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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입력 | 2014-05-22 03:00:00


소년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교실 창문에 붙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집으로 향하지 않고 방죽으로 갔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서 쫓겨났다고 말해 봐야 부모님 속만 상하리라는 것을 아는 소년은 방죽에서 시간을 보냈다. 반장에다 공부도 잘했지만 늘 수업료 독촉에 시달려야 했던 소년은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친 후 3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손을 도운 그는 아무리 고된 군사훈련도 더운 날 보리타작하는 것보다 쉬웠다고 말했다. 땀 흘리며 보리타작을 하다 보면 보리껍질이 옷에 박혀 얼마나 껄끄럽게 살을 찌르는지 빨리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소망대로 그는 고향을 떠나 헬기 조종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운지 몰라요. 저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져요. 땅 위에서 다투었던 일들이 좁쌀처럼 작고 사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늘을 날며 행복해하던 그가 소령으로 제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 많이 변했나 봐요.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마음으로 제대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려는 저에게 가장 친한 후배가 넌지시 알려주더군요. ‘제대 말년에 꼬박꼬박 열심히 나오시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아요’라고요.”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월급을 받는 동안에는 끝까지 열심히 근무해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은 정말 변한 것일까?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대 후 산림청 헬기 조종사로 재취업이 되었다. 군에서 열심히 기술을 갈고닦은 덕분이다. ‘빽’도 요령도 없이 오직 성실함이 전부인 그가 잘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뻤다.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에서 가까운 근무처를 자원한 그는 지금도 짬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가 늙은 부모님의 농사를 돕는다. 어렸을 적에 그렇게 하기 싫던 보리타작도, 그를 고향에서 떠나게 만든 가난도 이제는 웃으며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푸르게 물결치는 5월의 보리밭을 보면서 민초의 생명력을 느낀다. 결국 뒤죽박죽인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혁명가가 아니라 그 조종사처럼 묵묵히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