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경제부 기자
입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시간에 쫓길 때 “좋은 보험상품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라며 걸려오는 전화는 끔찍하다. 상사에게 “잘 좀 하지 그랬냐”는 핀잔을 듣고 있을 때 휴대전화를 받았다가 “축하합니다. 고객님∼”이라며 요란한 팡파르가 울리기도 한다.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스팸 전화’는 금융당국의 텔레마케팅 금지 조치로 크게 줄었다. 해방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텔레마케팅이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도입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1988년 미국에 본사를 둔 씨티은행이 ‘선진 영업 기법’으로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최신 정보를 발 빠르게 안방까지 전달해 주는 최첨단 영업수단이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대면 접촉 없이 전화만으로 정보를 알리고 상품을 파는 것은 혁신이었다. 업무 특성상 여성에게 유리하고 별다른 기술 없이 일을 할 수 있어 ‘괜찮은 일자리’로도 주목받았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여성단체나 사회복지법인이 텔레마케팅을 여성 직업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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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의 금지 조치 이후 텔레마케팅 업체들은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며 강력 반발했다. 여러 매체에서 어설픈 조치를 비판하는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당국은 결국 두 손을 들었고 말 많고 탈도 많았던 금융사 텔레마케팅 영업은 재개됐다. 당국이 물러서면서 텔레마케팅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기자는 과연 이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줘야 할지를 두고 고민이 컸다. 텔레마케터의 영업권을 보장하는 게 불특정다수의 전화 스트레스를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지 의문이 들어서다. 노골적인 전화사기는 줄었지만 정부(공정거래위원회)가 직접 전화 수신거부 홈페이지를 만들 정도로 텔레마케팅 문제는 심각하다. 올 1월 홈페이지 개설 후 두 달여 만에 ‘수신거부’로 등록된 업체가 4600곳이 넘을 정도다.
이제는 공이 업계로 넘어왔다. ‘묻지 마’식 전화영업이 계속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당국과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지금부터라도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정보 제공이라는 미명 아래 대출, 보험 가입 권유 전화를 받는 게 과연 정상적인 상황인지 소비자 입장에서 따져봐야 한다. 여성, 저학력자 등 취약계층의 생계가 걱정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고용 충격을 흡수할 대안 일자리도 고민해야 한다.
이상훈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