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죽음 오디세이본고리샤르 벨리보, 드니 쟁그라 지음·양영란 옮김/272쪽·2만5000원·궁리
독일 화가 한스 발둥(1484∼1545)의 1510년 작 ‘인생의 세 시기와 죽음’.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발둥은 신앙과 인간의 욕망, 삶과 죽음을 소재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모래시계를 든 사신(死神)이 노년기 여성의 팔짱을 낀 모습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소장. 궁리 제공
“나는 작품 덕분에 불멸에 도달할 마음이라고는 없습니다. 그저 죽지 않음으로써 불멸에 도달하고 싶을 따름이라고요.”(미국 영화감독 우디 앨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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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양반들, 뭔가 위로나 안식을 주는 말은 하나도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죽음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늙거나 병들어 죽고,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독이 퍼져 죽고, 자살 혹은 처형당해 죽는 여러 죽음의 방식을 하나하나 짚어간다. 심지어 벼락사까지 거론한다. 끝내는 사망한 뒤 인간의 육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패하는지도 덧붙였다. 뭐야, ‘여러분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죽습니다’. 죽음 백과사전이라도 쓸 기세다. 그런데 이 담담한 과학적 탐구 속에서 묘한 메시지가 아지랑이처럼 가슴을 휘감는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세포 번식을 통해 진화해왔다는 건 누구나 알 터. 한데 만약 최초의 세포가 자신의 에너지를 번식 능력이 아니라 본인 생명 연장에 몽땅 써버렸다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생물의 삶이 이어진 건 초기세포가 자손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을 일구는 밑거름이었다.
죽음 인지능력이 생물적 본능이란 대목도 흥미롭다. 돌고래나 침팬지, 코끼리는 숨진 동료 곁을 며칠씩 지키며 ‘애도 기간’을 갖는다. 이런 본능이 최상위 동물인 인간에게 사후세계를 고민하게 했고, 결국 종교의 탄생을 이끌었다는 것. 터키에 있는 인류 최초의 사원 ‘괴베클리 테페’가 인류의 첫 도읍보다 1만2000여 년 앞서 세워졌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인류는 삶보다 죽음을 먼저 지각했을지도 모른다.
암에 대한 시각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사실 암은 각기 다른 200여 종의 질병을 뭉뚱그려 부르는 명칭. 이들은 모두 세포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성장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흔히 암을 ‘싸워 무찔러야 할 질병’으로 표현하지만 암세포 입장에선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인체 시스템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어쩌면 환자가 암을 의지로 극복했다는 식의 미담은 실체적 본질은 놓친 채 인간의 정신을 너무 과하게 상찬하는 부조리를 낳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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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자들처럼 죽음 만물박사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여정을 걷다 보면 죽음을 혐오나 기피 대상으로 여기던 선입견이 차츰 옅어진다. 하긴 삶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죽음인 것을. 저자들이 마지막 장을 ‘죽음과 유머’로 채워 넣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음을 제대로 바라봐야 삶의 어떤 순간도 낭비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는 죽음이 아니라 삶”(프랑스 소설가 앙리 밀롱 드 몽테를랑)이니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