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 지 30년쯤 후였다. 종전 후 영국은 독일로부터 수거한 수천 대의 에니그마를 영연방국들에 나눠줬고, 이를 ‘완벽한 암호’라고 생각한 연방국들은 에니그마를 통해 비밀을 주고받았다. 영국은 가만히 앉아서 정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튜링 팀에서 일하던 한 장교가 “영연방국들이 더이상 에니그마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비밀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다가 1974년 비밀을 폭로하는 ‘울트라 시크릿’이라는 책을 썼다.
▷튜링이 고안한 암호해독기는 ‘만능기계’(컴퓨터)의 초보적인 형태다. 그는 암호해독기를 만들기 전인 1936년 발표한 논문에서 컴퓨터의 개념을 확립했다. 종전 후 그는 “부품을 추가하지 않고 프로그램만 바꿔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만능기계를 만들겠다”며 영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나의 기계를 계산표(스프레드시트)로, 문서작성기로, 데이터 관리기로 자유로이 쓸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