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때 日 미쓰비시 공장서 다리 부러지며 노예처럼 일했는데…일제강점기 일본 끌려가 강제노역… 양금덕 할머니등 4명 첫 법정 진술
4일 오후 광주지법 204호 법정.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할머니 4명이 한국 법정에서의 첫 증언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재판을 맡은 광주지법 민사12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법정 촬영을 취재진에게 허락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양 할머니는 증인선서에 이어 전범 기업인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서 가혹한 노역에 시달린 사연을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녀가 1944년 5월 전남 나주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반장이던 시절 일본인 교장과 헌병이 “일본에 가면 중학교도 가고 돈도 벌수 있다”며 학생들을 꾀었다. 일본에 간다는 학생 수가 많지 않자 교장은 양 할머니에게 “반장인데 왜 지원하지 않느냐”며 지원을 강요했다.
양 할머니는 부모에게 ‘일본에 가겠다’고 말을 했지만 부모는 “전쟁이 났는데 가면 죽는다”고 반대했다. 양 할머니는 교장과 헌병에게 “부모가 반대해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자 “아버지를 처벌하겠다”고 겁을 줬다. 그녀는 부모가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아버지 도장을 몰래 훔쳐 담임교사에게 갖다 줬다.
양 할머니는 “배가 고파 일본인 근로자들이 남긴 잔반을 먹었다. 배고픔과 서러움, 지진·공습 공포에 늘 시달렸다”며 “광복 이후 일본인들은 고향에 가 있으면 저축했던 월급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68년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1945년 10월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오해를 받아 순탄한 결혼생활도 하지 못했다. 34세 때 남편과 사별한 뒤 50여 년을 생선 장사를 하며 자녀들을 키웠다.
다른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84)는 1944년 12월 7일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다 지진으로 두 다리가 골절되고 청각을 잃었다. 김 할머니는 “지진 사고 후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는데 일본 정부는 치료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며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이동련(83) 박해옥 할머니(83)도 “죽기 전에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