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경진 경상대 교수 기존학설 반박 논문 파장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한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비문이 많이 훼손돼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7세기말 신라 신문왕 시절에 건립된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윤경진 경상대 교수는 이 비석이 신라 말기나 고려초기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48)는 최근 수선사학회 학술지 ‘사림’에 발표한 논문 ‘청주 운천동 사적비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에서 “비문에 실린 글들을 분석한 결과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692) 때보다는 태조 왕건(877∼943)이 고려를 창건할 무렵에 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가 사적비의 건립 시기를 나말여초로 보는 이유는 크게 3가지다. 먼저 비문에 제작 관계자로 등장하는 ‘천인아간(天仁阿干)’의 표기 방식이다. 천인은 사람 이름이고, 아간은 신라 관등제도 17등급 가운데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직위를 뜻한다. 그런데 7세기 신라의 인명 기재 방식은 ‘관직+관등+이름’의 순이었다. 천인아간처럼 ‘이름+관등’을 적는 것은 신라 말기 지방사회에서 쓰던 스타일이다.
‘하도낙서(河圖洛書)’에 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 하도는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 복희(伏羲)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 낙서는 중국의 성인(聖人)인 하우(夏禹)가 낙수에서 얻은 글을 일컫는다. 모두 새로운 천하가 탄생할 때 건국의 상징으로 쓴다. 그런데 신문왕은 둘째 치고 문무왕도 통일은 했어도 나라를 세운 건 아니다. 창업군주인 고려 태조로 봐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윤 교수는 비문의 ‘수공(垂拱) 2년’이란 중국 연호만으로 해당 연도인 686년(신문왕 6년) 즈음에 사적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기존 학설은 틀렸다고 본다. 보통 이런 비에는 관련 건물을 중창하며 내력을 적는 경우가 많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는 어떤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최연식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47)는 “논란이 컸던 사적비 제작 시기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 제기”라며 “다만 비문 판독이 완전치 않아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건립 시점의 조정이 불가피한 만큼 삼한일통의식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게 윤 교수의 지적이다. 삼한일통의식이란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지녔다는 인식을 말한다. 이런 의식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는지, 통일신라시대가 무르익은 후대에 만들어졌는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적비는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결정적 근거로 자주 거론해 왔다. 이유는 비에 나오는 ‘민합삼한이광지(民合三韓而廣地·삼한의 백성이 하나로 합쳐지고 땅은 넓어지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 이처럼 통일의지가 명확한 글을 새길 정도라면, 이런 세계관이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는 게 주류의 시각이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