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쿵작쿵작 밴드 소리와 함께 거리에 울려 퍼지는 조용필의 노래는 이 계절이면 늘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올여름이 아니면 떠날 수 없기라도 하듯 TV 화면 속엔 여행자들로 빼곡하게 메워진 공항 풍경도 스친다. 가히 ‘엑소더스’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요’라는 노래는 여행자의 군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굳이 노랫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여행본능이 잠재되어 있다. 요절한 수필가 전혜린은 이를 ‘먼 곳에의 그리움’이라고 했고, 프랑스의 소설가 장 그르니에는 ‘이곳 아닌 저곳에의 열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실은 이 여름, 나도 꿈꾸어오던 아프리카 케냐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곳에 관한 여행 자료들을 수집하다가 우연히 책 한 권을 집어 들게 되었다. 한 젊은 여행작가가 쓴 ‘하쿠나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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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새로운 곳에 가서도 거울을 보듯 나만을 보는 것.
2단계, 나를 떠나 ‘그곳’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3단계, 그곳에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
4단계, 내 것을 나누어 그곳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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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누구라도 가방을 꾸리다 말고 문득 ‘나는 몇 단계에 와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여행의 기록 자체는 젊은이의 글답게 통통 튀는데 이처럼 표지와 에필로그 글은 난처한, 그래서 피하고 싶기까지 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깐깐한 면접관 앞에 선 듯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짚어보니 나는 잘해야 1단계와 2단계 사이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세상을 헤집고 다녔건만 3단계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니 입맛이 씁쓸했다.
꾸리던 가방을 다시 풀었던 것은 다른 자잘한 몇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여행의 단계’가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여행이 나누고 헌신하며 더구나 거룩하기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보다 열 배 스무 배 어려운, 뼈 빠지게 일해도 저녁 한 끼가 자유롭지 않은 나라들을 향해 지도를 펼칠 때는 그 마음가짐이나마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를 지향함이 옳을 것 같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여행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행의 기술’을 쓴 여행철학자 알랭 드 보통도 “성숙한 여행자는 쉬는 시간마저도 빈자(貧者)를 생각하며 보낸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굳이 여행의 단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어렵고 가난한 쪽으로 발길을 향할 때면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인 것 같다. 자유와 일탈, 해방을 꿈꾸며 너나없이 가방을 꾸리는 계절이지만 한번쯤은 멈춰 서서 여행의 의미를 되새김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 또한 언제쯤이면 보다 성숙한 여행의 단계에 오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삶을 그냥 바라보고 구경하며 글과 그림으로 채집해 오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울고 웃으며 하나가 되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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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