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논설위원
첫 번째 만난 ‘을’은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식당에 돌아온 A사 협력업체 직원. 그는 “외국인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 동석했을 뿐, 일행에게 연락할 위치가 아니다”라며 대신 사과를 했다. 회식자리를 예약한 A사의 대리급 직원과 간신히 통화가 됐다. 그는 “밤늦게 상사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내일 아침에 확인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구두를 잃어버린 상대방의 다급한 처지는 “내 알 바 아니다”라는 태도였다.
식당 직원 아주머니는 “오늘은 택시를 타고 돌아가시고, 구두를 찾지 못하면 내 돈으로 물어 주겠다”며 택시비를 건넸다. 신발 분실은 식당 주인이 아니라 담당 직원의 책임이라는 거다. 식당 종업원은 주인과 묘한 ‘갑을(甲乙) 관계’로 엮인 또 다른 ‘을’이었다. 결국 식당 슬리퍼를 신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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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강자와 약자는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성경 마태복음에 ‘있는 자는 더욱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구절이 있다. 1960년대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이를 인용해 시간이 흐를수록 갑과 을의 격차가 벌어지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마태효과’로 정의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예술 같은 모든 분야에 마태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학계의 연구다. 마태효과는 공정한 시장경쟁과 조세정의, 그리고 분배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칡넝쿨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에서 갑과 을을 무 자르듯이 갈라 처벌하고 규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골목상권의 ‘을’을 도와준다고 대형마트를 규제하면 납품업체와 농민 같은 또 다른 약자가 울고, ‘갑’인 대기업을 골목에서 몰아내면 외국계 ‘갑’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현실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다 본인의 능력에 달렸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를 숭배하고 있다. 남보다 한발 앞서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약자인 ‘을’을 배려할 여유 따위는 없다. 공동체는 헐거워지고 개인은 뿔뿔이 흩어졌다.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주기 위해 전화 몇 통 걸어주는 배려도 쉽지 않은 사회가 됐다. 뒤틀린 갑을문화는 법과 제도만으로는 풀지 못한다. 파편화한 개인을 하나로 묶는 신뢰, 사회적 연계망, 상호호혜의 규범, 협력적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이 수직적 갑을 관계를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 바꾸는 열쇠다.
어제 6월 임시국회가 열렸다. 여야는 ‘갑을상생당’ ‘을지키기당’ 같은 구호를 내걸고 경제민주화 법안 처리를 벼르고 있다. 선거 때는 “특권을 내려놓겠다” “새 정치를 하겠다”며 유권자를 떠받드는 ‘을’인 척하다가 선거가 끝나자마자 ‘여의도 갑’으로 돌아간 그들이 을의 눈물을 닦아준다니. 국회의원들은 세비 삭감, 겸직 금지, 의원 연금 폐지 같은 약속부터 지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우리 국민의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처음 만난 사람보다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지 않은가. 경제민주화는 사회적 자본 위에 피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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