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국민대 명예교수
대통령의 시신은 조지아 주 웜스프링스 산장에 그대로 있었고 사망 사실은 아직 국민에게도 공표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통령 주치의가 배석한 가운데 엘리너 여사에게서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전해 들은 트루먼은 “지금 제가 뭔가 해야(도울) 할 일이 없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때 엘리너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야말로 당신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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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은 흔히 미국 현대사의 명장면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언론인 출신의 나카 아키라(仲晃)가 쓴 ‘아메리카 대통령이 사망한 날’이란 책에 나오는 매우 인상적인 내용이다.
당시 엘리너 여사는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으로 유명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부부로서의 사이는 썩 원만한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나,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당시만 해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이나 얄타회담에서 있었던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대일 참전에 관한 밀약 내용 등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앞서 소개한 일화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가 지켜야 할 자세에 관하여 동양적 정리(情理)와는 다른, 합리적이고 냉철한 서구적 이성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두 사람의 위 대화에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그들의 몸에 익은 분별심과 냉정함을 읽을 수가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理)와 정(情)의 구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당장 해야 할 일과 장차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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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책의 기술에 따르면 트루먼이 백악관 보좌진의 도움을 받아 국민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 사실을 3대 통신을 통하여 알림과 동시에 급히 대법원장을 찾아 대통령 취임선서를 마치고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해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전시 중이던 미합중국의 권력 공백 시간은 정확히 2시간 34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위 일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매사에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배려와 너그러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통령으로서의 트루먼은 대통령이던 남편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은 엘리너 여사와 가족들을 위하여 도와줄 일을 먼저 생각하였고,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엘리너 여사는 개인적 슬픔을 넘어 헌법에 따라 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할 부통령의 원활한 직무 인수와 국정 수행을 미리 걱정하는 지혜를 보여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지도자다운 교양과 몸에 밴 수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받거나 누리는 것보다는 주거나 지켜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는 책임의식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진적 덕목이자 자세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밖에도 또 있다. 크든 작든 위기에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국민적 감동’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결단이나 행정적 조치도 국민의 심정적인 지원을 얻으면 그 효과가 크게 높아지는 반면, 마음의 승복을 얻어내지 못하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결단이나 조치의 당초 정신마저도 제대로 살리기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돌이켜 우리의 현실을 보면 지금은 나라의 위기라고 할 상황까지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국방, 경제, 외교 등 수많은 과제 앞에서 그 구체적 경위야 어떠하든 박근혜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한 지 2주가 되도록 한 번의 국무회의도 열리지 않았던 사실이나, 4주째 새 국방부와 기획재정부의 장관, 그리고 신설된 국가안보실장의 임명이 지체되고 있다는 사실 등은 통상의 국민적 상식으로 보아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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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국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