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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미워할 수 없는 탕자

입력 | 2013-02-27 03:00:00

헨리 필딩의 톰 존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헨리 필딩은 1737년 당대의 최고 권력자 월폴 총리를 겁 없이 풍자한 희곡 ‘황금 엉덩이(The Golden Rump)’로 히트를 쳤다. 하지만 그 여파로 연극에 대한 검열법이 제정돼 극작을 포기하고 본업인 법률에 복귀했다.

그러던 중 1740년에 열다섯 살 하녀의 ‘정절’ 앞에 대지주가 무릎을 꿇는다는 이야기인 동시대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패멀라(Pamela)’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에 분통이 터진 필딩은 ‘패멀라’를 반박하는 소설을 세 편이나 썼다. 1749년에 내놓은 대작 ‘톰 존스(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패멀라의 도덕과 대조되는 남성적 미덕의 진수를 보여 주기 위해 7년간 집필한 작품이다.

필딩은 이 소설의 주인공 톰 존스를 통해 자기 보존적이고 타산적인 도덕이 아닌 진정한 덕성(남자다운 호방함과 인간적 따듯함)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는 남성적 ‘덕목’ 가운데는 여성의 성적인 접근에 대한 열성적 응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여성 독자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지극히 해학적이어서 분노보다는 실소를 자아낸다. 또 톰의 선량함과 관대함에는 조금도 가식이 없어서 그는 미워하기 힘든 인물이다.

필딩은 ‘톰 존스’의 서두에서 작가를 식당 주인에 비유한다. 자기 요리의 재료는 다른 모든 작가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이지만 최고의 소스로 조리해서 독자가 계속 즐겨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소설에는 각양각색의 무수한 군상이 등장해서 자신들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80첩 반상’과 같다. 필딩의 탁월한 풍자와 해학 덕에 이 거대한 잔칫상은 실컷 먹고 쉽게 삭일 수 있는 향연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계속 사건이 터지는 소설에서는, 하나의 갈등 요인이 발생해서 점점 심화되고 고조돼 위기를 거쳐 종결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인생의 법칙 또는 철리가 드러나지는 못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내면 깊은 곳의 고뇌와 갈등, 깨달음을 통한 인격적 성숙, 인생관의 변화 등 오늘날 독자들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요소들도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딩의 목표는 리처드슨류의 섬세한 내면 탐구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이 세상을 어지럽고 혼탁하게 하는 거칠고 무식하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군상을 비웃고 풍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 말, 하나의 행동으로 인물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

필딩의 폭로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펼쳐진다.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 침대에서 갓난아이를 발견한 올워디 씨는 아기가 가엾고 귀여워서 앞뒤 재지 않고 길러 주기로 한다. 반면에 그의 나이 지긋한 가정부는 자신의 ‘순결’을 강조하려고 비가 내리는 밤인데도 ‘죄의 씨앗’은 당장 바구니에 담아서 구호기관 앞에 갖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워디 씨의 노처녀 누이 브리젯 역시 ‘순결’을 코에 걸고 살지만 의외로 그 집에서 아이를 길러주는 데 찬성한다. 그는 가정부가 동네를 뒤져서 제니 존스라는 어떤 집 하녀에게서 아이의 어머니라는 ‘자백’을 받아 내자 하층민들은 수치도 도덕감도 없다며 비난을 쏟아 낸다. 그러나 사실 그 사생아는 브리젯이 낳았는데 착한 제니에게 불명예를 대신 덮어써 달라고 간청해서 된 일이었다.

이 외에도 남편이 하녀와 간통했다고 치안판사인 올워디 씨에게 고발했다가 남편의 수입이 끊어지자 후회하는 의부증 환자 파트리지 부인, 물려받은 재산으로 편히 살면서 철부지처럼 무엇이든 제 맘대로 해야 하는 웨스턴 씨,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아내를 감금하고 학대하는 피츠패트릭, 자기를 의지하러 온 친구의 조카딸 소피아를 질투해서 얼간이 귀족에게 그녀를 강간해서 결혼하라고 부추기는 레이디 벨라스턴 등 온갖 위선자, 악당, 얼간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연출하는 요지경 세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필딩은 주인공을 길 위에 올려놓았다.

18세기에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물류도 증가하고 인구의 이동도 빈번해져서 도로가 크게 개선되었지만 여행은 아직도 모험이었다. 노상강도를 지칭하는 말이 ‘대로의 사람(highwayman)’인 것이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또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았던 시절에 여행자는 여관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관은 헤어졌던 연인도, 은인도, 원수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과 칼부림이 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또 여관 주인은 손님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동원하지 못할 수단이 없었다. 물론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지방의 풍물과 정세도 접하게 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방탕하다는 판정을 면할 수 없는 톰을 미덕의 전형이라고 고집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톰은 이 도도한 신작로 같은 대작을 떠받칠 만큼 튼튼한 청년이며, 타산을 모르는 그의 순수한 선의와 아량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을 만하고, 또 풍성히 받았다.
● 톰 존스 줄거리는

선량하고 점잖은 대지주 올워디 씨는 어느 날 긴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 침대에 누워 있는 갓난아이를 발견한다. 그는 아이를 톰이라고 이름 짓고 일년 후에 태어난 누이동생의 아들 블리필과 함께 형제처럼 키운다. 그러나 블리필은 동네 사람들이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톰을 좋아하니까 그를 원수처럼 미워한다. 톰은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꿋꿋하게 채찍을 맞고, 아끼는 말을 팔아서 불쌍한 이웃을 구제하기도 한다. 사춘기가 된 톰은 바람기 많은 동네 처녀 몰리의 접근에 쉽게 응했다가 그와 결혼할 뻔하기도 하는데 요행히 모면한다.

톰은 이웃 동네 지주인 웨스턴 씨의 딸 소피아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구하다가 팔이 부러진다. 이 일로 둘은 가까워지는데 웨스턴 씨는 소피아에게 톰이 아닌 블리필과 결혼하라고 명령한다. 블리필의 모함으로 집에서 쫓겨나게 된 톰은 소피아에게 눈물의 작별 편지를 쓰고 영국을 등지려고 항구도시 브리스틀을 향해 떠난다. 한편 소피아는 폭군 아버지 때문에 고모의 친구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런던을 향해 떠난다.

톰은 브리스틀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곤경에 빠지고 봉변을 당한다. 한번은 남자에게 목을 졸리는 부인을 구한 후 그와 눈이 맞아 함께 여관에 간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여관에 투숙했던 소피아는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분노해서 떠난다. 후에 이를 알게 된 톰은 크게 상심하면서 영국을 떠나려던 계획을 버리고 소피아를 쫓아 런던으로 향한다.

길에서 만난 딱한 사람들에게 인심을 쓰다가 빈털터리가 된 톰은 런던에서 음탕한 귀족 부인의 손에 잡혀 돈까지 받아 쓰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소피아는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분노한다. 톰은 결투에서 사람을 죽인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설상가상 그는 여관에서 잠시 인연을 맺은 부인이 자기의 생모라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다행히 그와 결투했던 사람이 살아나고, 톰의 진짜 생모는 세상을 떠난 올워디 씨의 누이동생이라는 게 밝혀진다. 올워디 씨는 블리필의 거짓말과 계략을 알고 톰에 대한 오해를 풀며, 블리필을 내쫓고 톰을 후계자로 삼는다. 소피아도 넓은 아량으로 톰의 실수를 용서하고, 아버지 웨스턴 씨는 이제 톰과의 결혼을 명령한다.

※다음 주에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가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