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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허승호]완곡어법

입력 | 2012-12-12 03:00:00


기자가 미국에서 중고차를 살 때 일이다. 차주를 찾아가 협상했지만 쉽지 않았다. 차주가 기자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곤란해요.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습니다(Thank you for coming).” 비록 흥정은 깨졌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 마음은 가벼웠다. 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많다. 은행 등에서 ‘전산장애로 서비스가 30분 지연됩니다’란 안내가 나올 때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으레 붙는다. 완곡(婉曲)어법이다. 직접적으로 말하기 불편한 상황이나 사물을 우회적으로, 모호하게, 문어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완곡어법의 대가(大家)다. 일본 여성에게 ‘공연티켓이 2장 있는데 며칠 뒤 같이 갈래’라고 제의할 때 “초대 고맙다. 그날은 여차여차 안 된다. 하지만 다음에 꼭 초대해다오”라는 답변을 들었다면 딱지를 맞은 거다. ‘다시 초대해다오’라는 말은 진심이 아니다. 곧이곧대로 또 초대하면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듣게 된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문장을 늘리는 것도 일본식 완곡어법이다. 하지만 협상에서 거절의 뜻을 ‘검토하겠다’ ‘생각해보겠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군(軍) 성노예를 종군위안부, 침략을 진출 또는 진공(進攻)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곡이 아니라 본질 왜곡이다.

▷서울시내버스에서 충전식 교통카드를 사용할 때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안내음성을 가끔 듣는다. 그러면 차에서 내려 충전하거나 현금을 찾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잔액이 2500원 이하로 남으면 “충전이 필요합니다”라는 안내가 먼저 나온다. 그쪽이 완곡할 뿐 아니라 민망한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 한 시민의 아이디어를 서울시가 채택한 것이라고 한다.

▷가수 싸이가 ‘효순·미선 양 사망 사건’ 직후 주한미군 반대 집회에서 부른 랩의 ‘막말’에 대해 사과했다. ‘이번 논란으로 인기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워싱턴포스트의 질문에 그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에 진심으로,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과는 애매하게, 나중에 빠져나갈 계산으로 하면 안 된다. 직핍(直逼) 진솔하게 해야 한다. 싸이는 이번 비(非)완곡 사과를 통해 진정성과 성숙함을 보여줬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