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산업부 기자
마네킹들이 일제히 ‘성격 개조’를 한 것은 롯데백화점 디자인팀에 떨어진 특명 때문이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비주얼머천다이징(VMD)을 강화하라’라는 것이다. 불황 탓에 매출이 부진하다면 ‘꿈을 파는 멋진 공간’이라는 백화점의 본질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백화점에 입점한 패션 브랜드들 역시 최근 부쩍 마네킹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고객들의 시선이 통상 마네킹이 입고 있는 대표 상품들에 가장 먼저 쏠린다는 점을 의식해 추위와 세일 덕에 모처럼 백화점을 찾은 고객의 발목을 붙잡겠다는 의도다. 업체들이 마네킹을 너무 많이 활용하려 하다 보니 백화점 쪽에서 자제를 당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마네킹을 지나치게 많이 쓰면 매장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 만큼 매장 크기에 따라 3∼5개 정도로 줄여 달라고 권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마케팅 차원에서 마네킹의 활용도는 ‘보여 주기’에서 ‘보기’로 진화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한 이탈리아 제조업체가 제작했고, 최근 일부 의류업체 등이 도입하면서 화제와 동시에 논란이 된 마네킹 ‘아이시(EyeSee)’가 대표 사례다. 마네킹 한쪽 눈 부위에 내장된 카메라는 안면 인식 소프트웨어와 연동해 마네킹 앞을 지나는 고객의 연령대, 성별, 인종 등의 정보를 수집한다. 이 마네킹을 도입한 한 의류업체는 오후 시간대 매장을 찾는 손님의 절반 이상이 어린이라는 점을 포착하고 아동코너를 신설해 효과를 보기도 했다. 마네킹 이름이 ‘I see(나는 지켜보고 있다)’와 같은 발음으로 읽혀서인지 약간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부작용만 감내할 수 있다면 업체 입장에선 꽤 요긴한 ‘물건’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소설가 조경란 씨는 지난해 펴낸 에세이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사람’에서 “불완전하긴 하지만 마네킹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라고 썼다. 유년 시절 본 할리우드 영화 ‘마네킹’의 잔상이 선명해서인지, 필자 역시 마네킹의 시선을 가끔 의식하게 된다. 마네킹에 생명이 있다는 동화적 믿음은, 지금 같은 불황기에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몸 개그’라고 할 만큼 애크러배틱한 동작을 취하면서 온몸을 바쳐 물건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효율적 객관적으로 고객 정보를 수집하는 주도면밀함까지 갖췄다는 점에서 에이스 영업사원 못지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김현진 산업부 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