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돌아와 범죄자 된 美입양아 출신 강용문 씨 사연
1983년 미국으로 입양되기 직전 강용문 씨(가운데) 남매 모습. 강 씨가 쌍둥이 남동생(왼쪽)과 여동생(오른쪽)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무릎에는 양부모들이 알아볼 수 있게 영어로 적은 이름표가 놓여 있다. 시민단체 뿌리의 집 제공
지난해 한국으로 돌아온 강용문 씨. 강 씨는 한국으로 들어와 입양아와 미혼모를 돕는 시민단체에 참여해 자원봉사를 하며 지냈으나 결국 범죄자로 전락해 법정에 섰다. 시민단체 뿌리의 집 제공
‘내가 아이들에게 가졌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1983년 3월 강 씨의 아버지는 양육포기 각서를 쓰고 강 씨와 쌍둥이 남동생, 여동생을 보육원에 보냈다. 훗날 만난 그의 아버지는 “엄마의 잦은 가출로 키울 수 없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미국의 좋은 가정에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동생과 함께 콜로라도 주의 한 가정에 입양된 강 씨를 기다린 건 학대와 폭력이었다. 양부모는 세 남매를 짐승처럼 다뤘다. 욕설은 예사고 이유 없는 폭행이 다반사였다. 양부모는 배고픔에 떠는 세 남매를 세워놓고 오붓하게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 가끔씩 주는 음식에는 술을 탔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허리를 잡고 웃어댔다. 양아버지는 불붙인 성냥을 강 씨의 손에 쥐여주고 놓지 못하게 했다. 손에 화상으로 생긴 물집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한겨울 로키 산맥의 매서운 바람이 심한 날에는 강 씨를 벌거벗겨 문 밖으로 내쫓았고 성폭력까지 일삼았다. 연 소득 2만 달러(현재는 3만 달러) 이상이고 결혼 3년차 이상으로 45세 미만이어야 하는 등의 까다로운 입양 부모 조건도 강 씨 남매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한 것이다.
강 씨 남매는 마이애미로 재입양됐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던 두 번째 양아버지는 “한국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더 친근해 보였지만 참전 후유증으로 심한 조울증을 앓아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우울감에 빠지면 강 씨 남매뿐만 아니라 아내를 폭행했다. 양부모는 이혼했고 강 씨는 양아버지에게, 두 동생은 양어머니에게 맡겨졌다.
결국 16세가 되던 해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강 씨는 인종차별을 견디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가끔씩 연락했던 동생들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이 연이어 날아왔다. 쌍둥이 동생은 마약에 빠져 노숙인이 돼 연락이 끊겼다. 항상 강 씨에게 힘과 위로가 돼줬던 여동생은 가정을 꾸렸지만 2006년 임신 6개월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이 사고를 당했던 교차로는 강 씨가 출근하며 매일 지나던 곳이었다. 그는 교차로를 지날 때면 도망치듯 가속페달을 밟았다.
미국에서 마지막 희망을 잃은 강 씨는 그해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왔다. 친부모를 만난 기쁨도 있었지만 강 씨는 자신처럼 양부모로부터 학대받아 도망치거나 마약에 빠져 강제 추방된 해외 입양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부동산을 중개하며 돈을 모으면 한국에 돌아와 몇 달 머무르며 어려운 처지의 입양아를 도왔다. 미혼모와 그 아이들을 위해 영어를 가르쳤고 스스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한국어를 못하는 그가 안정된 직장을 잡기는 어려웠다. 악몽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런 고통을 이기기 위해 술과 도박에 손을 댔고 곧 중독 증세를 보였다. 범행을 저지른 날도 카지노에서 꼬박 이틀을 머무르며 30시간 넘게 도박하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이 해외로 입양시킨 아이는 16만4000여 명. 지난해에도 916명이 미국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세계 각국으로 입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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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일 기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