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우리나라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이런 장면들이 허다했다. 말기 암 환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이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얼굴이 쪼그라들도록 쇠약한 모습으로 분장한 주인공이 간신히 입을 열며 짤막한 유언을 남긴다. 그가 드디어 고개를 떨어뜨린다. 침대 옆에 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장중한 음악이 흐르고 ‘그가 눈을 감은 뒤…’라는 내용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웰다잉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수강생들조차 그런 모습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두가 인생 최후의 장면으로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별개의 세상이었다. 더 의외의 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죽음을 맞는 장면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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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던 중환자실의 한 수석간호사와 드라마의 ‘멋진 죽음’을 화제로 올린 적이 있었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이랬다. “세상을 곧 떠나게 된 환자가 가볍게 미소를 흘리며 몇 마디 유언을 남길 틈이 어디 있어요? 온몸이 아프고 탈진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뭐 살짝 웃어요? 유언은 무슨 유언이에요? 말도 안 되는 환상이지요. 당사자라면 그게 가능하겠어요? 어디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속사포로 대꾸하며 나를 놀렸다.
TV가 만든 마지막에 대한 환상
그는 세미나에서 연단에 오르자마자 정색을 하며 ‘드라마의 죽음은 거짓이다’라고 비판했다. 참석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미묘했다. ‘우리가 그런 것도 몰랐다니’ 하는 것과 ‘정말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떠나는구나’ 하는 감정들이 얽혀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멋있는 죽음을 많이 다룬다. 극적 효과를 노리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의료현장을 너무 모르는 게으름의 탓도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TV 드라마에 나타난 암 환자들은 극중에서 거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냥 죽어야 했으니 드라마 속에서는 생존자가 있을 수 없다. 참으로 거친 드라마가 많았다. 멋있는 죽음의 희생자가 된 주인공들이 시청률을 높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몰라도 우리들의 인생 마무리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 판타지였다. 지금은 암환자의 생존율이 60%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예전 드라마나 영화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은 죽었어야 했는데 어느덧 ‘부활’한 생존자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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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들은 장례식이 끝난 한참 후에야 그가 췌장암으로 쓰러졌으며 장기간 고통스러운 연명치료를 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처럼 모셨던 그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계속해 왔다는 것을 국민은 전혀 몰랐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히로히토는 수십 가지 의료 기구에 둘러싸인 채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반작용으로 존엄사를 선택하는 일본인이 늘어났다. ‘나는 저런 식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희망했다. 그때가 일본의 존엄사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편안한 인생 마무리를 준비해야겠다는 깨우침이 여러 사람에게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환상 깬 일왕의 최후
최철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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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영상]보건복지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나선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