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 기자
과거 취재 경험상 당연히 “우린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관장을 뽑았다” “낙하산은 근거 없는 얘기다”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공기업이란 게 옛날부터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말이 공모지, 공모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것이 있습니까? 다 위에서 떨어져 내려왔죠.” 자신도 이런 현실이 못마땅하다는 투의 자조(自嘲)적 답변으로 이해하긴 했다. 그래도 “다 알면서 왜 묻느냐”는 반응에 묻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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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당사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기관장 공모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취재팀은 사전에 기관장으로 내정됐다는 의혹이 불거진 한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낙하산 논란을 해명하려는 듯 본인 경력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의 마지막 말이 걸작이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으니까 위에서도 날 뽑아준 것 아니겠습니까?” 공모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내정됐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 것이다.
기관장 공모제를 취재하면서 이 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편법과 조작, 눈가림의 기막힌 사례들을 접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이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내려온 악습(惡習)이라 마치 그게 당연한 절차요, 대수롭지 않은 현실인 것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당수 공무원은 “아, 그거요?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하는 태도로 취재에 응했다.
공모제의 파행은 이미 세 정부에 걸쳐 이어졌다. 어느 정부도 제대로 수술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 현 정부도 정권 초기엔 ‘공기업 개혁’을 주된 화두로 꼽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의지가 후퇴해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다음 권력’인 정치권이 이 문제를 푸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새누리당 측은 “대안이 있다면 당연히 공약으로 제시하겠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공모제를 손대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선거캠프의 ‘식구’들을 취직시키는 데 공공기관만큼 좋은 곳도 없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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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제는 한국이 왜 아직 선진국이 아닌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13년째 이어지는 이 파행적 제도는 당장 없애든가, 대폭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은 이렇게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정부나 정치권이 그 이유를 더 잘 안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