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리카이저우 지음·박영인 옮김/408쪽·1만8000원·에쎄
공자는 소년 시절 노나라 귀족 계씨 집안에서 회계로 일했다. 그림 가운데 장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계씨, 그 옆에 장부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공자다.
공자는 첩의 자식이었다. 더욱이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집안 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어릴 적부터 자질구레하게 회계와 집사 일을 하고 소와 양을 기르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다 자신의 학문이 유명해지자 ‘사립학교’를 열어 가족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을 벌었다.
일본인 화가 시마다 유타카의 그림 ‘삼성도(三聖圖)’에 그려진 공자. ‘사기’ 공자세가에는 그의 키가 9척 6촌(220cm)의 장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쎄 제공
중국 최고의 사상가 공자의 일상을 떠올릴 때 초라한 행색으로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연상하곤 한다. 비록 배를 곯을지라도 꼿꼿한 정신으로 학문을 닦았을 거라고. 어쩔 수 없이 속세의 물욕에 얽매이고 마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낭만적 영웅을 꿈꾸기 때문일까. 하지만 공자는 우리가 추측하는 것만큼 궁핍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옛 사상가나 학자, 시인, 예술가들이 신선처럼 고결하고 청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당연히 깨진다. 이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선이 아니었고 먹여 살릴 가족도 있었다. 시인 백거이도 내 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중국에서 청렴결백한 관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포공은 월급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청렴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군자는 정의를 밝히고 소인은 이익을 밝힌다’는 유가의 경구가 떠오른다. 이들이 인격 수양에만 매진하지 않고 ‘짭짤한 맛’도 적당히 보았던 것은 유가의 도에 어울리지 않는 걸까. 저자는 이를 오해라고 말한다. 유가에서는 결코 물질을 경시하지 않으며, 다만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돈 버는 것을 경시할 뿐이라는 것. 중국 이학파의 대가인 정이(程이)는 “군자는 물질을 부리고 소인은 물질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진정한 현인은 내적으로 의리를 수양하고 외적으로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책 속 위인들의 주머니 사정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과연 현명하게 벌고 지혜롭게 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