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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12/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성난 파도 피하니 탄탄대로가…” “책임있는 자리 오르면…”

입력 | 2012-08-21 03:00:00

■ 박근혜 말말말로 본 인생역정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197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는 주한 유엔 군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부부를 접견한 자리에서 고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오른쪽). 동아일보DB

“성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였다. 엄청난 파도가 몰아쳐서 사람들과 같이 등대 밑에 피해 있는데, 그 순간 장면이 확 바뀌면서 태양이 비추고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길 너머 언덕에서 솟아올랐다. 시뻘겋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대학시절 꾼 꿈이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고 적었다고 한다. 어머니(육영수 여사)의 비극적 부음을 접했을 때 그는 꿈속의 성난 파도를 떠올렸다.

10대 대통령의 딸, 20대 퍼스트레이디, 30대 한 집안의 가장, 40대 국회의원, 50대 당 대표, 60대 대선 후보. 헌정 사상 첫 유력 정당의 여성 대선후보가 된 20일, 그는 다시 이 꿈을 떠올릴지 모른다. 타오르는 태양과 탄탄대로를 생각하며….

박 후보의 인생 역정을 그가 쓴 책 제목으로 나눠봤다.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1979년)

#1. 1961년 5월 16일

15일 밤 10시, 서재에 있던 박정희 소장이 육 여사에게 말했다. “그 가방 속에 권총 있지. 꺼내줘요. 다녀올게.”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고 느꼈을까. 육 여사는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그럴까?” 하고 안방으로 갔다. 군인의 딸이었던 열 살 근혜 양의 인생이 바뀐 첫 순간이었다.

#2. 1974년 8월 15일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하숙집으로 와야 한다.”

1974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그에게 전화가 왔다. 프랑스 공항에서 ‘암살’이라는 글자와 함께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린 신문을 보고서야 변고를 알았다. 박 후보는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고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당시 심경을 표현했다.

그는 22세에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유학 후 강단에 서겠다는 꿈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꿈도 물거품이 됐다. 그는 그해 일기에서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고 썼다. 곧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그는 정신문화운동인 ‘새마음운동’ 등을 펼쳤다.

○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삼아’(1979∼1998년)


#3. 1979년 10월 26일

27일 오전 1시 반경 전화벨이 울렸고,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박 후보가 그 순간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 후보는 9일장을 치르고 난 뒤 청와대를 떠나 서울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를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18년간 ‘음지의 세월’이 시작된다.

#4. 1989년 10월 26일

“묘소까지 가는 도중 마음의 울렁임을 참기 힘들었다. 추모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고 나면 감정이 폭발해 자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기장에 담긴 것처럼 15만 명의 참배객이 몰려든 박정희 사망 10주기 추도행사는 박 후보에게는 특별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흔적 지우기에 열을 올렸다. 추도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박근혜 남매는 아버지 기일이 되면 숨죽여 제사를 지냈다.

박 후보는 홀로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섰다. 1988년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박정희 일대기를 다룬 책과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0년 4월 영남학원 이사장직에 올랐으나 교내 운동권들의 반대로 7개월 만에 사퇴했다. 동생인 근령 씨와 갈등이 빚어져 육영재단 이사장도 사직했다.

“지나간 40년을 돌이켜보면…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1992년 5월 21일 일기)

○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1998년∼)

#5. 2004년 4월 15일

4월 총선을 보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후보가 눈물을 흘리면서 녹화한 사죄 방송연설 이후 민심은 움직이기 시작됐다. 2002년 대선 이후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 오명을 쓴 한나라당은 2004년 대통령 탄핵까지 추진하면서 분노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 10층짜리 당사를 버리고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인 121석을 이뤄냈고 이후 대표 시절 잇단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이뤄내며 정권교체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6. 2007년 8월 20일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읍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대선 경선에서 1.5%포인트 차로 석패했지만 그는 담담하게 패배 후보 연설을 읽고 당선된 이명박 후보를 축하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물었던 ‘아름다운 승복’은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이명박 후보 지지유세를 다녔고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회창 총재가 3번이나 집에 찾아가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선 승복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2008년 4월 총선 공천 때 친박 후보들이 학살되자 그는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한마디로 친박연대와 무소속 돌풍을 주도했다.

#7. 2010년 6월 29일


세종시 수정법안의 국회 본회의 찬반표결을 앞두고 박 후보는 본회의 단상에 섰다. 1998년 의정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치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박 후보는 이명박 정권 출범 후 현안에 대해 의견 피력을 자제해왔다. 현 정권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누리당이 올해 4·11총선 때 충청 지역에서 압승을 거둔 배경은 그의 ‘세종시 지킴이’ 행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당 속 야당’의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하는 계기도 됐다.

#8. 2011년 12월 19일

“당이 이렇게까지 국민에게 외면 받게 됐는지 참당한 심정입니다. 우리 정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일에 저의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지난해 12월 19일 비상대책위원장직 수락연설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주변은 ‘독배’라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비대위원장직을 맡았고 외부 비대위원과 함께 당 강령·당명 개정을 이뤄내며 4·11총선에서 152석의 승리를 이뤄냈다.

박 후보는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잘 입에 담지 않는다. 다른 후보들이 “제가 대통령이 되면…”이라고 말할 대목에서 그는 “제가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면…”으로 바꿔 말한다. ‘대통령’ 자리에 대한 권위와 책임감을 잘 알고 있는 동시에 그 자리를 향한 의지도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입에 자주 담는 말은 ‘국민’이다. ‘국민’은 과연 12월 19일 그를 ‘책임 있는 자리’에 올려줄 것인가. 이제 꼭 4개월 남았다.



▶ [채널A 영상] ‘비운의 공주’ ‘선거의 여왕’…박근혜는 누구인가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동영상=영어 연설하는 어린시절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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