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진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방송사 파업은 정치행위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가 KBS 이사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의 추천권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도 정치권이 동의하면 정당 추천 없이 이사진을 구성할 뜻을 내비쳤다. 양 방송사의 이사진이 정당 간 안배 없이 정치색이 덜한 전문성을 갖춘 인물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공영방송사들은 지난 20여 년간 정권 교체기마다 되풀이된 ‘낙하산 사장’ 파동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송사의 20여 년 지병(持病)은 정치적 양극화로 치달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와 맥을 같이하지만 방송 제도상의 몇 가지 문제점이 보태져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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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방송계 안팎의 주요 이슈인 공정성 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다. 낙하산 사장 거부 운동도 공정성을 훼손했거나 훼손할 염려가 크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물론 방송법이나 방송사에서 마련한 방송 강령에는 이 기준이 비교적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고 중립성과 불편 부당성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1980, 90년대 각계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만들어진 이 기준이 2000년대 들어서 신입사원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되지 않았고 방송사 구성원들, 특히 젊은 방송인들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공영방송 제도에는 영미식 자유주의, 북유럽의 조합적 다원주의,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식 양극화된 다원주의 등 서로 다른 방송 체제에서 비롯된 가치, 규제기준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자유주의 모델과 다원주의 모델은 공정성 기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방송계 스스로 脫정치화 노력해야
예컨대 영미식 자유주의적 시각에서는 뉴스 프로그램이 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럽식 다원주의 시각에선 뉴스건 시사 프로그램이건 다양한 정파적 의견과 입장이 표현될 수 있어야 민주적이며 공정성은 프로그램 단위가 아니라 방송 전체 속에서 실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이는 뉴스를 담당하는 기자와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 사이에서도 감지된다. 뉴스는 길어야 3분 이내로 팩트 소개에 치중하므로 아이템별로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기가 비교적 용이하지만 긴 내러티브를 가지는 시사 프로그램의 경우는 중립이나 불편부당을 고수하려면 양시론이나 양비론에 빠지든가, 초점 없고 맥 빠지는 내용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젊은 방송인들에게는 구두 위로 발등 긁기처럼 갑갑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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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어느 한 가지 순수 모델로 갈수는 없다. 해법은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를 현재처럼 서로 충돌되지 않게 하면서 합의 가능한 방향으로 절충해 합리적인 공정성 이념을 확립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길은 멀고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8월에 이루어질 양 방송사 이사진 구성이 정치색 논란 없이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실험이 될 수 있다. 방송계 스스로 탈정치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병행해야 실험은 성공하고 방송이 정치에 예속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박명진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mjinpark@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