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는 자체가 우주생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
그럼 여성은? 여성은 그럴 필요가 없다. 먼 길을 떠날 필요도, 고행을 자처할 필요도 없다. 그는 말한다. “여성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교감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 그것은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감으로써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다. 특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 자체가 훌륭한 통과의례와 다름없다.”(‘대칭성 인류학’) 사실 그렇지 않은가. 아이를 낳는 건 그 자체로 우주적 생성의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이를 기르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즉 여성에겐 일상 자체가 자연이고, 곧 자연의 비밀지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미래의 문명을 구할 두 여성이 나온다. 하나는 바람계곡의 공주님 나우시카, 또 다른 하나는 나우시카의 미래를 예언하는 눈먼 할머니다. 그들의 저력과 내공은 간단하다. 동식물 혹은 바람 등과의 깊은 감응력, 그리고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함. 이것이 바로 여성성 혹은 자연지의 구체적 표상이 아닐지.
그도 그럴 것이 자연지가 침묵할수록 생명의 원천과는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 즉 지금 여성들은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불통즉통(不通則痛·통하지 못하면 아프다)! 이건 그저 문화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매우 시급하고도 절박한 정치적 사안이다. “당신이 어머니라면 어머니로서의 행위도 정치적이다. 질병을 치유하거나 과거를 기억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행위다.”(크리스티안 노스럽의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하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 “우리가 기다렸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