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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김종석]슬로시티서 너무 빨리 떠난 젊음

입력 | 2012-05-14 03:00:00


김종석 스포츠레저부 차장

“여기는 곶감과 자전거의 천국 상주시입니다.”

서울에서 200km를 달린 승용차의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도시로의 입성을 자상히 알려줬다. 지난주 경북 문경에서 열린 제90회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에 출장 가던 길이었다. 문경의 인접 도시인 상주 거리에는 자전거 조형물이 널려 있었다. 상주가 자전거 도시라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바로 며칠 전 상주시청 여자 사이클 선수들은 큰 교통사고에 휘말렸다. 20세 전후의 앳된 선수 6명이 상주 인근 국도에서 훈련을 하다 25t 트럭에 치여 3명은 세상을 뜨고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차마 사고 현장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근방의 한적한 국도에는 규정 속도인 시속 80km를 지키는 차량이 드물었다. 선수들은 질주하는 차량 사이로 아찔한 레이스를 펼쳤을 게다.

정구 취재 도중 들른 상주시청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담당 공무원의 책상에는 영결식 참석자에게 보낼 감사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관련 직원들은 말을 아꼈다. 마침 이날 열린 경북도민체육대회 출정식 참가자들은 검은 리본을 달았다.

상주는 자전거와 오랜 인연을 지녔다. 평탄한 분지에 곡창이라 일찍이 자전거가 보급됐다. 1925년 상주역사(驛舍) 개청 기념으로 전(全) 조선 자전거대회가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인구 10만6000명인 상주의 자전거 보유대수는 8만5000대로 가구당 2대 이상이다. 자전거 교통수단 분담률은 전국 평균 2.4%의 10배에 가까운 21%에 이른다.

당초 정구를 육성했던 상주는 이런 전통을 계승하고 홍보할 목적으로 2003년 사이클부를 창단했다. 이번 사고는 자전거 본산에서 일어났기에 더욱 참담해 보인다. 상주시청 사이클부의 이애정 선수(22)는 사고 당시 진천선수촌에 머물다 7명의 선수 중 홀로 참변을 피했지만 충격만큼은 비켜갈 수 없었다.

어렵게 통화가 된 그는 대표팀을 떠나 구미 집에 머물고 있었다. 목소리는 무거웠고 뭘 물어보기도 쉽지 않았다. “사고 전날도 통화했는데…. 다음 대회 때 보자고 했는데….” 이애정은 11일 중국 충밍에서 끝난 국제대회에도 불참해 그토록 원하던 7월 런던 올림픽 출전이 힘들어졌다. 혼자 남았다는 사실에 자전거 안장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그런 그를 보며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이 떠올랐다. 훈련장을 향하던 대구가톨릭대 테니스부 선수 4명이 전철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료들보다 1시간 먼저 숙소를 나왔던 선수 1명만이 화마를 피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그 선수는 “동료 부모님들 볼 면목이 없고 죄송스럽다”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테니스부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뙤약볕에도 터질 듯한 심장을 견뎌내며 자전거 페달을 돌렸던 꽃다운 그들에게 닥친 비극은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시 담당 직원이 건네준 A4지 19장에는 국내 최강이라는 사이클부가 지난 10년 동안 거둔 눈부신 성과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성적지상주의에 앞만 보고 달리다 정작 중요한 가치가 매몰된 건 아니었을까. 허술한 교통 법규, 열악한 훈련 여건, 낙후된 지방재정…. 이번 참사의 문제점은 어딘가 낯이 익다. 신기루 같은 허상만을 좇다 속은 곯아 터지는 현실이 쳇바퀴처럼 돌고 있는 건 아닌지. 자전거 도시를 떠나면서 달팽이가 그려진 입간판이 불쑥 눈에 띄었다. 지난해 상주가 지정받았다는 슬로시티의 상징물이었다. ―상주에서

김종석 스포츠레저부 차장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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