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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일진 “나도 살기 위해 후배들을 때렸다”

입력 | 2012-01-05 23:56:00

■ 여주 학교폭력 주동 학생들이 말하는 ‘정글같은 교실’
“1년 선배는 王-2년 위는 神… 매주 30만원씩 상납”




경기 여주의 한 중학교에서 벌어진 일진 폭력사건으로 떠들썩했던 4일 오후. 동아일보 취재팀은 이 사건 주범이자 이 학교 3학년 '짱'인 김모 군(15)을 학교 주변의 한 PC방에서 만났다. 김 군은 함께 폭력에 가담했던 친구 3명과 함께 '워크래프트3'라는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 김 군 일행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식사를 하던 중 TV 뉴스에 자신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 이들은 "저거 우리 교복 아니네" "딴 학교 찍어놓고 왜 우리 학교래"라며 황당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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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불쑥 일행 중 한 명이 취재팀에게서 스마트폰을 빌리더니 인터넷으로 자신들이 연루된 사건 기사를 검색했다. 그러곤 "사람들이 우리 엄청 욕해. 우리 신상(신상정보) 다 털리겠어"라고 했다. 이들은 취재진의 스마트폰을 돌려 쓰며 각자의 미니홈피를 모두 '비공개'로 바꿨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소년원 가는 건 안 무서운데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욕하는 건 싫다"고 했다. 김 군은 키 180cm에 체구가 건장했지만 친구들에게 "내 홈피 방문자 수 오늘 100명이야. 벌써 털렸나봐"라고 말할 땐 어린 중학생의 초조함이 묻어났다.

● 한번 일진 되면 못 벗어나

김 군 등 이 학교 3학년생 20여 명은 여주에서 악명 높은 일진 그룹이었다. 최근 1, 2년 새 61차례에 걸쳐 후배들에게서 260만 원을 빼앗고 상습 폭행한 데다 가출 여중생 2명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경찰은 4일 주범인 김 군과 박모 군(15)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학교 2학년 A 군(14)은 김 군 등에게 폭행을 당하던 순간을 취재진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일단 형들이 집합을 걸면 일렬로 쭉 서요. 그러면 입에 옷을 물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막 때려요. 한번은 엎드려뻗치게 한 상태에서 담뱃불로 팔을 지졌어요." 상납액이 적다거나 선배들을 험담한다거나 군기가 빠졌다는 게 집합의 이유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싸움을 잘했던 김 군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진들의 영입 1순위가 됐다. 신입생 중 덩치가 좋거나 외모가 튀는 아이들이 해당 학년의 대표가 되고 그러면 선배들이 접근해와 일진으로 임명하는 식이다. 조직폭력배들이 새 조직원을 모집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한 학년 위는 '왕', 두 학년 위는 '신'으로 불린다. 한 가해학생은 "선배가 후배에게 관계를 맺자고 하면 거부할 수 없고 한번 일진이 되면 나올 수도 없다"며 "한 명이 도망치면 동기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데려올 때까지 때린다"고 했다.

이들에게 폭행은 선후배 간의 유대감을 다지는 '의식'이었다. 김 군은 "일단 심하게 팬 후배는 누군지 제대로 기억이 된다. 후배 입장에서 맞는 일은 선배에게 내 이름과 얼굴을 각인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하창고나 야산 등을 아지트로 정해 일주일에 2, 3차례 때리고 맞았다. 숨을 참게 한 뒤 가슴 부위를 눌러 정신을 잃게 만드는 '기절 놀이'를 게임처럼 즐기곤 했다. 김 군 등은 2학년 후배들을 줄 세워놓고 자위행위를 시킨 것에 대해서도 "다 웃자고 한 일"이라고 했다.

● 물고 물린 상납의 사슬

일진이 되면 선배들로부터 매주 4, 5차례 5만~30만 원을 상납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3학년이 2학년에게 상납액을 할당하면 2학년은 1학년에게 '재하청'을 주는 방식이다. 후배가 없는 1학년 기수는 동급생이나 초등학생의 돈을 뺏어 상납금을 마련한다. 선배 일진은 후배들이 모아 준 돈으로 술집에 가거나 오토바이를 산다.

상납은 기수별로 모아서 하는 단체 상납과 특정 선배에게 일대일로 하는 개인 상납으로 나뉜다. 개인 상납의 경우 출신 초등학교와 싸움 능력 등에 따라 선후배 간 배분 비율이 7 대 3, 8 대 2 등으로 제각각이다. 김 군은 "제때 대금을 못 맞추는 후배들은 '저승사자 만나고 올 때까지' 5시간 정도 장소를 바꿔가며 맞는다"며 "후배를 때릴 때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어쩝니까. 저도 먹고살아야죠"라고 말했다.

● 무능력한 학교

김 군 역시 저학년 시절엔 선배들에게 수시로 폭행을 당하고 돈을 뜯겼다. 일진으로서 감수해야 할 통과의례였다. 2학년 때는 후배를 때리지 않으면 선배의 폭행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자 김 군과 함께 폭행을 당했던 친구가 피해 사실을 교사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핵심 가해자 1명을 전학 보내는 것 외에 학교 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전학 갔던 가해자는 해당 학교의 거부로 다시 돌아왔다. 김 군이 고교생 선배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는 고자질했다고 보복을 당했다. 김 군은 "선배들을 신고해서 학교에서 쫓아낸다고 해도 학교 밖에서 늘 마주칠 수밖에 없다"며 "학교나 어른은 믿을 수 없으니 상황에 빨리 적응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가해 학생들은 일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형들 한두 명 빠지면 다른 형들이 그 자리를 채워요. 형사처벌 받고 오면 깡이 더 세져서 나타나죠."

김 군은 지난해에 3학년이 되면서 일진 그룹의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교사들은 초기엔 김 군을 자주 혼냈지만 언젠가부터 "졸업할 때까지만 얌전히 있다가 나가라"고 타일렀다. 김 군은 "예전 선배들은 매일 삽자루로 맞으면서 힘들게 학교 생활했는데 요즘 후배들은 손으로만 맞으니까 많이 편해진 것"이라며 "가끔 찔릴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찌질이'처럼 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 '폭력 대책' 비웃는 일진들

김 군 등은 최근 학교가 자신들을 경찰에 신고한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동료 일진인 박 군은 "우리가 (저학년 때) 당할 땐 못 본 체하던 선생님들이 이제 와서 우리만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며 "전통대로 했을 뿐인데 우리만 재수 없게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가해학생은 "학교 폭력이 적발되면 선생님도 같이 처벌해야 한다"며 "그래야 학교에서 우리 같은 애들을 방치 안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나오는 학교폭력 대책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담교사 늘린다고요?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상담 받으러 가는 애들 명단 파악해서 겁주면 신고 못해요." 한 가해 학생은 후배들이 폭행사실을 학교에 알린 뒤 인터넷 메신저 대화명을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로 바꿨다.

김 군 등은 다만 학교 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다는 방침에 대해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우리를 때린 선배들이 엄하게 처벌을 받았더라면 '벌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따라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4일과 5일 취재진과 10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던 김 군 등은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김 군은 "지금 이 난리만 없었으면 운동학원 다니면서 복서의 꿈을 키웠을 텐데 망했다"며 "원래 경찰관이 꿈이었는데 경찰서 들락날락거려서 힘들 테고 소방관이라도 되고 싶은데 소년원 가면 그마저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군은 '스펙 관리'를 위해 중학교 3년 내내 반장과 부반장을 하기도 했다. '사과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일이 잘 풀리면 사과할 텐데 소년원 간다면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취재진과 마주 앉은 김 군과 박 군은 모두 성한 얼굴이 아니었다. 김 군은 한쪽 입술이 터져있었다. 얼마 전 8살 많은 친형에게 주먹으로 맞은 상처였다. 박 군 역시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두른 소주병에 맞아 머리 곳곳에 '땜빵'이 많았다. 그 두 학생은 "제가 학교에서 이러고 사는 지 집에선 꿈에도 모를걸요"라고 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