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무’ ★★★☆
망망대해에 고립된 어선을 형상화한 대형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연극 ‘해무’. 어눌해 보여도 할 말은 다하고 마는 배우 송새벽 씨(뒷모습)의 독특한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단 연우무대 제공
연극 ‘해무’(김민정 작, 안경모 연출)는 그런 ‘저주받은 배’의 서사를 사실주의 수법으로 풀어냈다. 해무(海霧)는 바다에 짙게 끼는 안개를 말한다. 바다 한복판에서 해무를 만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연극은 이를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공포’로 그려낸다.
연극은 그 공포를 실화로부터 길어 올린다. 2001년 밀입국자를 태우고 여수로 들어오던 어선 태창호의 어창(魚艙) 환기구가 막히는 바람에 그 안에 타고 있던 중국인과 조선족이 대거 질식사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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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커녕 일터까지 잃게 된 어부들은 이를 운명의 도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거친 풍랑을 헤치며 해경의 추적을 따돌리다가 환기구가 막혀 갑판 아래 어창에 있던 조선족들이 기관실에 있던 한 명의 여인을 제외하곤 모두 죽어버린다.
여기서 연극은 현실보다 더 깊은 곳을 파고든다. 코앞에 닥친 화를 면하기 위해 반인륜적 범죄를 또 저지른다. 하지만 죄의식은 죄보다 더 무서운 법. 짙은 해무에 갇힌 채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들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절망과 도박, 극한의 한계상황을 거쳐 광기로 치닫는 드라마를 든든히 받쳐주는 것은 어선을 형상화한 대형 무대다. 2007년 극단 연우무대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소극장에 오를 때는 가오리 수준이었던 무대는 점차 커져 이제는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울 고래가 됐다.
이 ‘고래’는 공연 내내 자맥질을 펼치면서 망망대해에 고립된 갑판 위의 막막함, 얽히고설킨 신경전이 펼쳐지는 그 아래층 선실의 팽팽함, 절박한 사랑 앞에 목 놓아 우는 기관실의 애절함을 다양한 앵글로 담아낸다. 질펀한 사투리 섞인 거친 입담으로 무장했지만 작은 신경전에도 폭발하고 마는 뱃사람들의 어눌한 심성을 그려낸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칭찬할 만하다. 특히 최고참 선원 신철진 씨와 막내 선원 역의 송새벽 씨의 연기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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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0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3만∼5만 원. 02-3668-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