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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가인열전]이선희

입력 | 2011-10-10 03:00:00

아픈 청춘들은 ‘J에게’ 편지를 썼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데뷔 때부터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동시에 품은 이선희는 1980년대 ‘언니부대’를 이끌어낸 거의 유일한 가수였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다. 동아일보DB

폭발적이면서 동시에 호소력 넘치는 서정성을 겸비한 당대의 보컬리스트 이선희는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로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후 2005년 13번째 정규 앨범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조용필의 대척점에 서서 한국 주류 대중음악의 영광을 구가해 왔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이 수록된 6집(1990년)을 고비로 절정기를 지났다고 하지만 그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발표한 7장의 앨범은 ‘스타’ 이선희에서 ‘음악인’ 이선희로 성숙해 가는 의미심장한 발걸음의 편린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조용필과 김현식, 그리고 이문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선희에게 1980년대는 절정의 시대였다. 박미경 권진원 이상은 박선주 같은 셀 수도 없는 젊은 여성 뮤지션을 배출한 음악 등용문이었던 강변가요제가 촌스러운 파마머리를 한 키 작은 보컬리스트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시선을 보냈던 1984년 바로 그해에 이선희는 곧바로 정상권의 슈퍼스타로 급상승한다.

작곡가 송주호가 전곡을 담당하며 ‘아, 옛날이여’와 ‘갈등’ 같은 히트곡을 터뜨린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펄시스터즈와 김추자가 열어 놓은 ‘미스 다이너마이트’ 계열의 후계자임을 증명하는, 젊음의 약동과 후련한 템포가 살아 숨쉬는 당시의 10대 정서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앨범으로 부상했다.

‘오빠부대’로 불렸던 10대의 수용층이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가던 1980년대 중반, 소녀 팬들로부터 지속적인 열광을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이선희의 무기는 평범하고 친근한 이웃집 언니 같은 보이시한 이미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카리스마 짙은 보컬이었다. 1986년이 저물어가던 겨울에 발표한 3집과 2년 후의 네 번째 앨범은 해방감과 아련한 그리움을 동시에 묘사할 줄 아는 이선희 보컬의 압도적인 여운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초기 결정판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한국의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구사해온 풍부한 감정이입의 창법을 바탕으로 발라드에 약동하는 새로운 시대의 호흡을 불어넣었으며 ‘영’과 ‘아름다운 강산’의 리메이크에서 보여 주었듯이 비트 있는 로큰롤의 샤우팅 창법까지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작사 작곡의 명콤비인 양인자-김희갑에 의해 탄생한 ‘알고 싶어요’라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악보의 행간에서 어린 숙녀들이 순정만화처럼 품고 있던 애틋한 감정을 이토록 절실하게 호소하는 보컬은 그 이전과 이후에 찾기 힘들 것이다. 이 패턴은 세련된 음악적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극적 구성법)를 지닌 ‘사랑이 지는 이 자리’와 ‘나 항상 그대를’ 같은 명곡을 작곡한 송시현과 동반하며 절정의 꽃을 피운다.

이선희의 보컬은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에너지를 품고 있고 서구적인 발성 속에서도 동양적인 정숙미가 흐른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8집에서 김영동의 ‘조각배’나 ‘한네의 이별’을 리메이크하고 황청원의 시에 김영동이 곡을 붙인 ‘너를 만나고 싶을 땐’이나 김지하 시의 ‘어느 할머니의 극락’, 그리고 그 어떤 사랑노래보다 아름답고 정겨운 ‘언제나 사랑해’를 불렀을 때 이선희는 브라운관과 콘서트의 슈퍼스타의 틀에서 벗어나 더 깊고 광활한 음악의 세계로 비상한다.

이선희라는 이름은 영광과 절망이 교차한 한국 여성 뮤지션 역사의 거대한 방점과 같다. 1994년 9집의 흥행 참패는 그의 음악 이력에서 가장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인연’과 ‘장미’라는 걸작을 만든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리고 성숙한 여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2005년의 걸작 ‘사춘기’ 앨범을 우리 손에 안겨 주었다.

이선희, 그는 가수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는 직업적인 음악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말보다도 노래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 더욱 편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다. 그는 말했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나에겐 뭔가 슬픈 힘 같은 것이 있었다.” 아련하지만 강력한 슬픔의 힘. 그것이 이선희 음악의 요약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