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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Life]태국인 수만명은 지금 한국 아이돌 데뷔 연습 중

입력 | 2011-10-01 03:00:00

■ 태국의 케이팝 열풍 르포




케이오틱(K-Otic)은 한국 일본 태국 3개국의 멤버로 구성된 남성 아이돌그룹이다.

“수백 명요? 어휴… 수천수만 명이겠죠. 서울에서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젊은이들이 지닌 궁극의 꿈이에요.”

지난달 23일, 기자가 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진행 중인 박진아 대표(33·여)에게 “한국에서 연예인을 하고 싶은 태국 젊은이 수가 수백 명은 되겠지요”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태국어를 전공한 박 대표는 방콕에서 한국과 태국을 잇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최근 유행하는 한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태국 아이돌을 한국에 직접 데뷔시키는 것이다. 소속 연예인이나 연습생을 한국 무대에 진출시키려는 것은 태국 현지 연예기획사들도 마찬가지.

“짧게라도 한국에서 활동한 이력만 있으면 태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어요. 사업적으로 큰 기회가 열리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은 서울이 바로 뉴욕이고 런던인 셈이에요.”

○ 팬은 물론 가수들도 한류 모방

태국이 한류의 새로운 중심이라는 얘기는 몇 해 전부터 알음알음 우리에게 전파됐다. 기자 역시도 반신반의했지만 현지의 10대 문화를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2NE1’과 ‘슈퍼주니어’가 등장하는 광고판이 방콕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고, 현지방송은 한국방송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기자가 방콕에 도착한 지난달 18일 시나카린위롯 대학에서는 국내 한 방송사 주관으로 ‘케이팝(K-Pop) 커버댄스’ 경연대회가 한창이었다. 커버댄스는 기존 가수들의 안무를 완벽하게 모방해 표현하는 것으로 일종의 ‘팬덤현상’이다.

아이돌 명문인 ‘가미가제’ 소속의 5인조 걸그룹 키스미파이브(Kiss Me Five). 태국 연예인들은 단순히 케이팝의 영향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다. 출처= www.ilovekamikaze.com

이날 대회에선 114개 팀이 예선을 치렀다. 결선에 오른 팀은 18개. 커버댄스를 준비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잠재적인 가수 준비생들이다. 태국에선 해마다 수백 개의 케이팝 커버대회가 열린다.

최근에는 태국 가수들까지도 좀 더 적극적으로 케이팝을 모방하고 있다. ‘모노(Mono)’란 연예기획사가 ‘포미닛’과 ‘2NE1’을 모방해 데뷔시킨 ‘캔디 마피아’가 대표적이다. 한국인 유명 댄서를 모셔와 케이팝을 벤치마킹한 이들은 “막 한국에서 도착한 것 같은 태국인 댄스그룹”이란 콘셉트를 내세웠다. 이 밖에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케이오틱(K-Otic), G20 등도 케이팝 스타들의 이미지를 전폭 차용했다.

○ “주말에 한국 가요순위 프로 보며 공부”

“주말마다 실시간으로 한국의 3개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지켜봤어요. 춤을 따라하면서 저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죠.”

최근에는 실제로 ‘코리안 드림’을 실현시키는 연습생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위성방송으로 한국TV를 보며 데뷔를 준비했다는 16세 동갑내기 텐(Ten)과 사오(Sao)는 26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국내의 한 연예기획사가 이들을 스카우트했기 때문이다. 한국 연예계에서도 태국 연습생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외모도 출중하고 노래도 잘하는 닉쿤(2PM)과 조이(Joy·라니아)의 성공이 영향을 끼친 것이다.

2002년 케이팝을 처음 태국에 소개한 ‘DR뮤직’ 윤등룡 대표는 2008년 태국에서 제2기 베이비복스(현재의 ‘라니아’) 태국인 멤버를 모집한다는 TV 광고를 냈었다.

“끼와 재능을 겸비한 3000명이 몰렸어요. 그 가운데 1등과 2등을 서울로 초청해 훈련시켰죠. 그런데 한국적 훈련방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는지 1등이 돌아가고 남은 아이가 조이예요. 외국인 멤버를 통한 케이팝의 확대재생산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 “예능인 자질은 태국인이 한국보다 나아”

태국인들은 스스로 “예능인으로서의 자질은 한국인보다 낫다”고 자부한다. 실제 태국 대중문화의 경쟁력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GMM깸미’라는 세계적 미디어 기업의 존재가 이를 대변한다. CJ E&M(미디어)과 SM엔터테인먼트(연예기획)를 합친 모양새인 이 회사의 자산 규모는 5조 원에 이르며 ‘태국의 조용필’로 불리는 통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를 거느리고 있다.

10여 년 전, ‘베이비복스’ ‘H.O.T.’ 비 등이 처음 태국에 진출할 당시 한국 연예관계자들이 방콕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48층 규모의 GMM깸미 사옥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물론 이제는 태국이 한국 대중문화 산업 따라잡기에 혈안이 돼 있다. GMM깸미가 운영하는 연예인 사관학교 미파 아카데미에는 1000여 명의 훈련생이 있는데 모두가 케이팝 스타일 배우기에 열심일 정도다.

GMM깸미에서 음악프로듀서로 활약한 글렌(40)은 최근 독자회사를 설립하고 케이팝 가수들의 동남아 진출을 돕고 있다. 그는 “2007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제이팝(J-pop)을 누르고 케이팝이 동남아를 휩쓸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태국의 케이팝 열풍이 거꾸로 한국 대중문화의 본질까지 바꾸게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케이팝은 우리가 원해온 바로 그 스타일이에요. 섹시하되 음란하지 않고 서구적이지만 아시아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곧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 인재들이 케이팝 시장에 뛰어들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성과 스타일을 케이팝에 불어넣겠지요. 5년 정도만 기다리면 새로운 구도가 펼쳐질 테니 두고 보세요.”

기자가 태국을 떠나는 날 숙소인 두지타니 호텔 로비는 태국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검문검색이 삼엄해 직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한국 그룹 ‘티아라’가 왔다”고 했다. 마침 로비에 티아라 멤버 효민과 은정이 “사랑해요”를 외치는 팬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경호원이 팬들을 밀어내려고 하자 효민이 “아니다, 사인을 더 하겠다”고 호기롭게 답했다. 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기자 곁에 있던 한 태국인은 “놀라운 변화”라고 감탄했다. 초기 한류스타들은 선글라스 끼고 도망 다니기 바빴는데 이제는 소통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은 단순히 동남아에서의 흥행을 넘어,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는 시점에 와 있다. 케이팝이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통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방콕=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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