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됐다고?” 신발주머니에 ‘농구선수 강현숙’ 써주신 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강현숙 한국농구연맹 심판위원장
그날 밤늦게 귀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빨간 헝겊으로 만든 신발주머니에 ‘농구선수 강현숙’이라고 써주셨다. 나는 이 신발주머니를 신나게 들고 다녔다. 운동을 좋아해 엄마와 야구장에서 데이트를 하실 정도였던 아버지는 내가 갓난아기 때 “현숙이는 앞으로 농구선수 시킬 거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라서인지 나는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무턱대고 손을 들었고 그것이 내 농구 인생의 첫걸음이 되었다. 아버지의 말이 씨가 된 셈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인지 지극정성으로 딸의 선수생활을 뒷받침해 주셨다. 내가 결혼해 한창 세 딸아이를 키울 즈음 칠순을 못 넘기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질 때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그 헌신에 눈물이 핑 돌곤 한다.
나는 무학여중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그때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단체연습을 했다. 집에 오면 계단 뛰기와 줄넘기를 하거나 비좁은 마당에서 드리블 훈련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코치가 돼 계단 오르내리기 목표 횟수를 체크했다.
내가 원한 대로 무학여고에 진학한 1960년대 후반은 서울에 지금과 같은 아파트 단지가 없었다. 주택가에 가로등도 없어서 외진 동네는 밤길을 다니는 것이 무서웠다. 서울 금호동 산동네에 살면서 나는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 혼자 아침 연습을 하려고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나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겁도 없이 걸어 다녔다. 교문이 닫혀 있으면 담을 넘어 체육관에 가 개인기와 슛 연습에 몰입하곤 했다.
방과 후에도 단체연습이 끝나면 나는 개인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면 날은 어두워지고 배는 고픈 데다 몸은 물 먹은 솜 같아서 집에 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밤늦게까지 개인연습을 같이한 친구와 둘이서 지친 몸으로 버스를 기다리다가 구멍가게 선반에 놓인 크림빵의 유혹을 견디지 못해 버스비로 빵을 사먹고 밤길을 걸어간 적도 있다.
이렇게 농구에 빠져 생활하는 동안 과묵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서울 경동시장에서 몸에 좋다는 약초와 꿀을 사오시고 당시 귀하다는 오렌지를 구해 특별식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출전한 모든 경기를 빠짐없이 보러 오셨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가까이 오지 않고 떨어진 곳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실 뿐이었다.
여고 시절 약간 쑥스러운 아버지와의 추억도 있다. 쌍용기 중고농구대회 때 무학여고가 억울하게 우승을 놓쳤지만 내가 최우수선수상을 받게 되자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황도 캔을 사 가지고 귀가하셨다. 아버지는 잠에 빠진 나를 깨우려고 했는데 내가 골을 내면서 안 일어나자 캔을 따서 내 입에 황도를 넣어주셨고 잘도 받아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난 내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빈 황도 깡통을 보고는 나를 빼놓고 먹은 것으로 알고 아버지와 엄마에게 누가 다 먹었느냐며 화를 낸 것이다.
강현숙 한국농구연맹 심판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