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섬 유배지 14곳 돌아보기◇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이종묵 안대회 지음·이한구 사진/368쪽·1만8000원·북스코프
바다에서 바라본 남해도. 오른쪽 높은 봉우리가 금산이다. 김만중은 남해에서 보낸 3년간의 유배시절 동안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와 평론집 ‘서포만필’을 완성했다. 북스코프 제공
귀양이란 말은 귀향(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에서 나왔다. 그러나 초기엔 한양과 가까웠던 귀양살이가 점점 멀어졌고, 조선 중기 이후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보내졌다. 그것도 모자라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까지 더해졌다.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며 유배객을 유폐시키는 형벌이다.
유배객들이 막다른 섬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어땠을까. 당대의 수재로 평가받던 이행은 연산에 의연히 맞섰다가 거제도에 유배된 후 “밥 한 끼 먹을 때도 네댓 번씩 일어나고, 열 밤이면 아홉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조선 최후의 선비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된 후 곡기를 끊고 결국 이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쿠데타로 교동도에 위배된 연산군은 갑자사화(1504년) 당시 자신이 처음으로 시행했던 ‘위리안치’ 제도에 자신이 갇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종실록’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눈도 뜨지 못했다”고 기록했으며, 결국 그는 석 달 만에 31세로 죽었다.
그러나 유배지가 고통과 절망의 땅만은 아니었다. 절해고도 외로운 섬에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이도 있었다. 바쁜 일상에 휘둘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도 얻지 못하다가 유배를 와서야 산수를 즐기는 호사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선비가 골치 아픈 정치와 세상사에서 단절된 채 학문에 정진해 위대한 저서를 남겼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박물학 저서인 ‘현산어보’와 소나무 벌목을 비판하는 혁신적인 논문 ‘송정사의’를 썼다. 유배지의 자연과 그곳에서의 삶이 남긴 저작이다. 노수신은 19년의 세월을 진도에 갇혀 살면서 그 분노를 학문으로 삭였다. 그는 훗날 화려하게 조정으로 복귀해 남은 생을 대학자이자 시인으로 인정받으며 살았다. 그를 가리켜 명문장가 유몽인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는 19년을 기한으로 잡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70세의 고령에 백령도로 유배된 이대기는 백령도의 생태와 전모를 충실하게 기록한 ‘백령도지’를 남겼고, 조정철은 ‘정헌영해처감록’이란 책을 남겨 제주도의 풍물과 인심을 오늘에 전한다. 저자는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유배객들에 의해 궁벽했던 섬이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고, 세상에 알려졌다”고 말한다.
섬에 갇힌 분노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도 여럿 전한다.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유배지에서 탄생했고, 김만중도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각각 함경도 선천과 남해도 유배시절에 썼다. 신지도에서 불행한 생을 마친 이광사는 아내가 자결하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동국진체’라는 글씨를 남겼다. 조희룡은 유배지 임자도를 그림으로 빛냈다. 임자도의 나무와 돌과 노을과 구름을 보고 새로운 감각의 눈을 틔웠으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꽃피운 것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