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내려놓았다, 이번이 4번째 작별… 빠듯한 살림살이… 아직도 집엔 3남매…지은 죄 너무 커서 이제와 후회한들…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기자namjin@donga.com
아기는 자신이 버려지는 줄도 모르고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가야 미안하다.’ 김 씨의 눈물은 볼을 타고 떨어져 아기를 감싼 포대기에 떨어졌다. 2006년 8월 2일. 김 씨가 갓난아기를 버리는 ‘첫 범죄’를 저지른 날이었다.
경남 남해군에 살던 김 씨의 남편(42)은 택배기사였다. 고향 오빠였던 남편의 월급은 150만 원 정도. 8세 아들, 6세 딸, 5세 아들 등 아이가 벌써 셋이나 있어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림은 늘 빠듯했다. 방 두 개짜리 단독주택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매일 새벽에 나가 밤늦게 귀가해 육아는 모두 김 씨의 몫이었다. 김 씨는 간혹 할인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 때문에 포기하고 남편 수입에만 의존하는 전업주부로 살았다.
김 씨는 어려운 살림 때문에 아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했지만 죄책감 탓인지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김 씨는 며칠 뒤 아기를 버린 절을 찾았다. 아기를 감싼 헌옷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절 사람들이 잘 키워주고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 DNA수사로 불구속 입건
그로부터 1년 뒤. 김 씨는 또다시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설마’ 하며 피임을 하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임신중절 수술비는 50만 원 안팎이었지만 생활이 빠듯한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큰돈이었다. 2008년 8월 15일 오전 1시 그는 결국 아기를 낳은 뒤 다시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교회로 갔다. 사람들 눈에 잘 띌 수 있는 교회 주차장에 아기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죄책감이 덜했다.
다시 2년 뒤인 2010년 5월 29일. 전날 오후 11시 반경 아기를 낳아 집 근처 어린이집 앞에 헌옷으로 감싼 아기를 내려놓고 발길을 돌렸다. ‘잘사는 사람이 키워주는 게 아기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세 번의 임신 기간에 김 씨는 아이들에게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압박붕대로 배를 힘껏 묶고 다녔다. 뚱뚱한 편이어서 주위 사람들도 임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올해 7월 24일, 네 번째 아기를 버릴 때는 경찰에 단서가 잡혔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40분경 집 근처 사회복지회관 1층 여자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화장실 옆 칸에서 인기척이 났지만 눈치를 못 챈 듯했다. 미리 준비해간 비닐봉지에 아기를 담아 근처의 가정집 대문 앞에 내려놓고 집으로 왔다.
○ 세 아기는 적법한 절차거쳐 입양돼
마침 지나던 행인이 아기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남 남해경찰서는 주택가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서 김 씨의 범행 장면이 담긴 영상을 확보했다. 나흘 뒤 경찰은 김 씨의 신원을 확인해 입에서 DNA를 채취했다. 버려진 아기의 DNA와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친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 씨도 순순히 그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경찰은 미제사건으로 분류해 놓았던 세 건의 ‘영아 유기사건 파일’을 꺼냈다. 버려질 당시 채취해둔 아기들의 DNA와 대조한 결과 친모가 김 씨로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김 씨가 버린 아기는 모두 남자 아기였다.
김 씨가 버린 세 명의 아기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입양돼 잘 자라고 있다. 네 번째 아기도 정식 절차를 밟아 입양될 수 있다. 하지만 김 씨 부부는 넷째 아기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제 와서 후회하고 반성하면 뭐 하겠어요. 지은 죄가 너무 큰데….” 김 씨는 경찰의 신문에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김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구속감이었지만 그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아이가 3명인 데다 유기한 아이 모두 다행히 살았기 때문이다.
남해=정재락 기자 ra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