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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5·16 50년]이만섭 前국회의장이 말하는 ‘5·16과 박정희’

입력 | 2011-05-17 03:00:00

기자였던 이만섭 前의장“5·16 옹호 않지만 불가피한 측면 구국 신념 잇고 억압문화 끊어야”




동아일보 DB

《 50년이 지났지만 5·16군사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혁명이냐 쿠데타냐는 사건의 정의부터 5·16 이후 태동한 군사정부의 정치·경제·사회적 공과에 이르기까지 5·16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으로 한국의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아일보는 두 원로 정치인 이만섭, 임채정 전 국회의장의 증언과 평가를 통해 5·16과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주요 논점을 되짚어봤다. 》
이만섭 전 국회의장(사진)은 5·16군사정변 직후 동아일보 기자로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했고 정계에 투신한 이후 ‘혁명동지’에 버금가는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3선 개헌에 반대해 박 전 대통령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평소 “내 정치 스승은 박 전 대통령”이라고 말해왔다. 2009년엔 회고록 ‘5·16과 10·26-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를 내기도 했다.

―5·16 소식은 어떻게 접했나.

“그날 새벽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중학(대구 대륜중) 후배인 해병대 장교라고만 밝힌 사람이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소식을 듣고 어떤 느낌이었나.

“사실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장면 정부는 무능의 극치였고 사회는 거의 아노미 상태였다.”

―그래도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 아닌가.

“장면 정부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총을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는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는 수준이었다. 무정부 상태였다.”

―5·16 주체들과 처음엔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안다.

“1961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그해) 9월 유엔총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조속히 정권을 민간에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써야 한다’고 주장해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1면에 냈다. 그러자 군사정부는 ‘윤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기사화했다’며 나를 두 달 넘게 육군 형무소에 가둬버렸다.”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의 시작은….

“1962년 가을 박 의장이 울릉도를 시찰할 때 처음 만났다. 박 의장이 강원도에서 울릉도로 가는 전함을 탄다는 것을 듣고 미리 전함에 들어가 기관실에 숨어 있다가 배가 출발한 후 갑판에 나와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입니다’라고 인사했다.”

―박 전 대통령의 반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요즘 동아일보가 문제다. 쌀값이 오르면 1면 톱으로 쓰니 쌀값이 더 오르는 것 아니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실보도야 신문의 사명 아니냐’고 맞서 초면에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의 정치철학을 소상히 듣게 됐다.”

―첫 대면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나.

“소탈했고 민족중흥, 경제발전, 자주국방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민족주의자로 기억한다. 울릉도에서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논길이나 걷자’더니 피폐한 농촌 상황과 왜 자신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얘기했다.”

―정계 진출 이후 박 전 대통령을 수시로 만났다고 들었다.

“공화당 의원으로 등원한 후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를 청와대로 찾았다. 요즘 말로 ‘번개 모임’이 잦았다. 그때 자주 불렀던 사람이 내 중학 은사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그가 10·26사태를 일으켰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권 초반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은 어땠나.

“3선 개헌 전까지만 하고 물러났다면 더 많은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경제개발을 위한 노력은 이미 다 알려진 것이고 나는 유연했던 용인술에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 외교가에서는 외교관 출신인 최규하 씨를 외교부 장관 후보로 밀었으나 박 대통령은 ‘지금은 추진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동원 씨를 장관에 임명해 결국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3선 개헌으로 박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했는데….

“1969년 6월 29일 청와대에 들어가 ‘5·16을 군사혁명에서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2시간 40분 동안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이 전 의장은 이날 이후 더는 사석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고 여당 공천을 받지 못해 1978년에야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5·16과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나.

“5·16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학자들은 헌정 중단에 따른 민주주의 후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한가한 얘기다. 군이든 민간이든 누구라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유신체제 이후에는 경제개발이라는 성과보다는 민주주의 후퇴라는 폐해가 더 많았다. 결국 5·16과 박 대통령은 ‘승계와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의 결단과 시대정신, 구국을 위한 신념과 도전은 승계하고 민주주의 후퇴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와는 단절해야 한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이만섭 前의장

― 1932년 대구 출생
― 195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1963년 6대 국회의원(공화당 비례대표)
7, 10, 11, 12, 14, 15, 16대 의원(8선)
― 1985년 한국국민당 총재
― 1993, 2000년 14, 16대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