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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강국이 앓고 있다/2부]‘한국형 복지’ 사회적 합의 이루자

입력 | 2011-03-03 03:00:00

낸 만큼 받는 복지 신뢰… 원칙 일관된 정책… 이것이 정답




스웨덴 마트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근로자. 이 나라는 세금을 투명하게 사용한다는 믿음이 국민과 정부, 정당과 정당 사이에 형성돼 있어 복지제도 개혁 과정에서 극단적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스톡홀름미래연구소 제공

“최근 일본 학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첫 질문이 ‘스웨덴 국민은 세금을 많이 내는데 어떻게 행복지수가 높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케네스 넬슨 스톡홀름대 사회연구소 박사가 지난달 16일 기자가 찾아갔을 때 전해준 일화. 그는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 세금을 쓸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라고 답했다”며 “스웨덴 국민은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정부가 보호대책을 제공하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2008년 불거진 금융위기 이후 ‘스웨덴 모델’이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조세와 사회보험료를 합한 국민부담률이 44%나 되는 전형적인 ‘큰 정부’지만 금융위기가 닥치자 어느 나라보다 강하고 유연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의 밑바탕에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있다. 투명하고 정직한 정부, 이를 믿고 세금을 내는 국민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증세 없는 복지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증세에는 저항감이 크다. 김용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내가 낸 세금을 내가 돌려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신뢰가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이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 정부 기업 노조 파트너십으로 갈등 피해

스웨덴은 연금 수급권자에게 기초연금을 주고, 납입액만큼 추가연금을 주던 제도를 ‘낸 만큼 돌려받는’ 제도로 1998년 개편했다.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스웨덴은 연금개혁위원회를 구성하고 15년간 논의를 거쳤다. 7개 정당의 실무단은 기업, 노조 등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모아 세세한 숫자까지 합의한 뒤 발표했다. 정부와 기업, 노조가 협상을 계속하면서 파트너십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해 연금개혁으로 인한 시위가 이어졌던 프랑스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은 편이었다. 장폴 피투시 파리정치대 교수는 “국민과 정부는 일종의 사회계약 관계다. 특정 정책에 반대할 수는 있지만 신뢰관계를 통해 ‘프랑스의 미래’를 합의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 일관된 정책이 정부에 대한 신뢰 키워

영국은 노동당과 보수당이 번갈아 집권하지만 복지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노동당인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근로 연계형 복지’를 꾸준히 추진했다. 보수당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비대한 국립의료시스템(NHS) 개혁에 나섰지만 무상의료 원칙은 버리지 않았다.

보수당 정부의 실업수당 개혁안이 발표된 다음 날(지난달 18일), 이언 고흐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영국의 복지개혁은 국가가 의료,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기본 전제 아래서 효율적인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라고 개혁의 배경을 설명했다.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복지제도를 큰 틀에서 운용해야 국민이 고통분담에 호응한다는 말이었다.

스웨덴은 3년마다 정부 예산의 상한선을 정한다. 적어도 이 기간에는 정부 정책이 급격하게 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최연혁 쇠데르테른대 정치학과 교수는 “1932∼1976년 장기집권했던 사민당은 좌파 지지로 탄생했지만 기업과 노조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정책이 극단으로 쏠리는 현상을 막았다”고 말했다. 1976년 집권한 우익 정권도 비효율적인 복지제도의 누수를 손보는 정도로 사민당 정권의 정책을 유지했다.

○ 한국 ‘신뢰’ 수준 OECD 하위권

고흐 교수는 “한국도 유럽을 답습하지 말고 정부와 국민의 합의를 통해 독자적인 복지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무상복지 시리즈로 시작된 한국의 복지논쟁은 정치논쟁에 머물 뿐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우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고령사회가 닥치기 전에 국민연금 재정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국회 내 연금제도개선특위는 5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의 신뢰지수 조사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24위를 차지할 정도로 신뢰가 낮은 나라라는 점도 한국형 복지에 대한 합의를 어렵게 한다.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아직 정부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못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복지제도가 성공하려면 투명한 정부, 정직한 정치가 기본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국회가 한국형 복지에 대한 책임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리·스톡홀름·런던=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 석재은 한림대교수“어떤게 옳은가보다 어떻게 오래갈지 논의를” ▼

유럽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지속가능한 체제’를 향한 복지개혁이 한창이었다. 마침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 실업자에 대한 근로를 강제하고 가구당 복지수당 총액을 제한하는 복지개혁안이 발표됐다. 하지만 이번 개혁은 선제적 해결이 아니라 사후처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 활성화를 위한 복지 축소가 얼마나 성과를 낼지 회의적 반응도 적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복지국가에 대한 믿음이 훨씬 강고했다. 보편적 아동양육서비스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연금개혁에 성공하는 등 제도 재편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회 갈등을 겪으면서도 인본주의 전통과 정치적 지성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모습에서 저력이 느껴졌다.

스웨덴은 경제영역과 복지영역 간 상호존중과 공존의 지혜를 발휘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최대한 친기업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일자리와 보편적 복지혜택을 보장한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 가격은 시장원리에 따라 거래되지만, 부담이 어려운 계층에는 소득보조가 주어지는 식이다. 시장과 복지가 철저히 역할을 분담하고 투명하게 공존한다.

스웨덴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연안전성(flexicurity)’을 실천하고 있었다. 경쟁력 없는 기업은 철저히 시장원리에 따라 도태시키지만 근로자들은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 결과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한 적응력이 어느 국가보다 뛰어났다. 경제사회를 통합한 의사결정 구조와 투명한 소통 및 ‘신뢰’는 지속가능한 체제 구축에 핵심 요소였다.

한국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보편이냐 선별이냐의 이분법적인 소모적 논쟁에 머물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지속가능한 사회체제를 가능케 하는 핵심요소들이 무엇일지, 먼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 “정부-기업-노조의 ‘복지 딜’… 원칙은 시장경제” ▼
요아킴 팔메 스톡홀름 미래연구소장

“흔히 북유럽 국가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오해입니다. 정부와 기업, 노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정책 파트너로 공조해 왔습니다.”

요아킴 팔메 스톡홀름 미래연구소장(사진)은 지난달 1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은 지난 100년 동안 정부와 기업, 기업과 노조 간 제안과 협상을 반복하는 ‘딜(deal)’을 하고 약속을 지키면서 신뢰가 공고히 쌓인 상태”라고 강조했다.

1973년 설립된 스톡홀름 미래연구소는 인구구조를 예측하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정책을 연구하는 곳이다. 팔메 소장은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스벤 올로프 팔메 총리의 아들이기도 하다.

팔메 소장에 따르면 스웨덴이 2005년 상속세, 2007년 부유세를 잇달아 폐지한 것은 ‘딜’의 한 가지 예다. 국내 자본의 해외 유출이 심해지자 글로벌 시장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졌고, 정부는 부유세를 폐지하는 대신에 기업은 국내에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딜’을 했다는 설명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시장경제의 원칙은 분명하게 작동했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기업에는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근로자들을 재교육해 효율적인 기업으로 옮기도록 돕는다. 팔메 소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키워주고 기업이 아닌 개인이 승자가 되도록 돕는다. 정부가 나서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전략을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율 인상이나 연금 개혁은 이해관계가 부닥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의회는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까. 팔메 소장은 “국가와 국민은 일종의 계약관계다. 일관된 정책과 민주적 합의 절차를 거쳐 신뢰를 쌓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스톡홀름=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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