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학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처럼 우리가 쓰는 한자 어휘는 영어 단어에서 온 것들이 많다. 심지어 영어와 한자가 결합된 어휘도 적지 않다. 깡패는 ‘gang’과 패(牌·무리)가, 깡통은 ‘can’과 통(桶)이 결합된 것이다. 요즈음 흔히 쓰이는 신조어 대부분이 이런 것들로 컴맹(com盲), 광클(狂cl), 악플(惡pl), 선플(善pl), 그리고 예전부터 써왔던 급커브(急curve), 급템포(急tempo), 세미나실(seminar室), 테이블보(table褓), 택시비(taxi費), 스키복(ski服)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일본어와 결합된 것도 무심코 쓰고 있다. 우리가 주유소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는 ‘만땅’은 만(滿·채우다)과 ‘tank’의 합성어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라는 뜻이며, ‘땅’은 tank의 일본식 발음 ‘단쿠’에서 온 것이다.
한자, 복잡한 개념 축약에 강점
한자는 이처럼 장황하고 복잡한 개념을 가장 작은 단위의 어휘로 축약할 수 있는 좋은 기능이 있다.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 ‘출차주의(出車注意)’라는 표지판이 있다. 만약 한자가 싫어 이것을 풀어 쓴다면 ‘차가 나오니 조심하세요’라 해야 할 것이다. 넉 자면 될 것을 열 자로 써야 하니 경제적으로도 낭비일뿐더러 시각적으로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가독성도 떨어진다.
백화점에 가면 옷가게에 ‘갱의실’이라는 곳이 있다. 사고 싶은 옷이 몸에 잘 맞는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입어 보는 곳이다. 병원에서도 옷을 갈아입는 곳을 똑같이 갱의실이라 한다. 그러나 갱의실은 잘못된 표기이며 ‘경의실’이라고 해야 옳다. ‘更’은 음이 두 가지로 ‘다시 갱’ ‘바꿀 경’이다. 이곳은 옷을 바꾸어 입는 곳이지 다시 입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경의실이 맞는 표기이다. 만약 이것도 한자어로 쓰기 싫어 ‘옷을 갈아입는 곳’이라 쓴다면 ‘출차주의’를 풀어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자는 이처럼 포괄적인 개념을 축약하고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강소기업도 그렇고 침매공법도 그러하다. 한자가 싫다고 영어로 쓴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말과 글을 더욱 오염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어휘를 반드시 한자어로 쓰자는 것은 아니다. 한자 어휘를 풀어 쓸 수 있는 것은 바꾸어 쓰는 것이 옳다. 예컨대 예전에 쓰던 구근식물(球根植物)을 알뿌리 식물로, 방안지(方眼紙)를 모눈종이로 바꾸어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方은 ‘모 방’으로 네모의 뜻이며 우리가 앉는 방석(方席)도 네모 모양의 자리란 뜻이다. 이렇게 한자 어휘를 쉽게 풀어 쓰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하지만 아무리 바꾸어도 바꿀 수 없는 어휘들은 한자어로 쓰는 것이 정확하게 개념을 알 수 있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쉽게 풀어 쓰는 노력은 계속돼야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