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10년후의 성장엔진을 찾아라]아시아 금융허브 굳히는 싱가포르

입력 | 2011-01-26 03:00:00

정부가 금융 인프라 - 인재 육성 주도, 그러나 ‘官治’는 없다




좁은 영토, 거의 없다시피 한 부존자원, 적은 인구….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이 같은 한계를 금융, 관광, 무역을 통해 극복했다. 특히 금융 관련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덕분에 싱가포르는 홍콩, 런던, 뉴욕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의 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싱가포르의 금융 산업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윤희로 싱가포르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 센터장은 “싱가포르의 금융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려는 국가들이 많지만 싱가포르는 지금도 금융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이 같은 노력이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흔들리지 않았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 ‘즉시 투입 가능한’ 인재 육성

1954년 설립된 싱가포르 폴리테크닉은 싱가포르 금융의 허리 역할을 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다. 지난해 12월 7일 이곳에서 만난 크리스토퍼 청 교수는 “미시, 거시와 같은 기본적인 경제 교육도 하지만 최고 목표는 금융 현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을 거쳐 간 학생들은 파생상품 개발자, 외환 트레이더, 애널리스트 등으로 활동한다.

3년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매년 500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1년에 2만 싱가포르달러(약 1740만 원)가량 하는 학비는 정부가 90%, 학생이 10%를 부담한다. 폴리테크닉 측은 “부존자원이 없는 싱가포르의 특성상 금융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서는 관련 인력 육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정부가 학비의 대부분을 부담한다”고 설명했다.

경제학의 기초부터 증권 옵션 외환 선물 거래 실습까지 금융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 외환 거래는 아예 학교 내에 모의 딜링룸을 갖춰 놓고 실제 외환시장과 똑같은 데이터로 학생들이 거래 실습을 한다. 리리 한 교수는 “3년 전 실시한 모의 외환거래 대회에서는 현직 트레이더를 제치고 폴리테크닉 학생이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싱가포르 폴리테크닉의 독특한 점은 모든 학생이 짧게는 6주에서 길게는 6개월가량의 인턴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인턴십은 씨티, HSBC, 스탠더드차터드(SC), UBS 등 글로벌 금융회사와 OCBC, DBS 등 싱가포르 금융회사에서 이뤄진다. 청 교수는 “이들 회사에서 ‘이런 교육과정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가 있으면 즉시 다음 학기부터 관련된 내용을 수업에서 가르친다”며 “현장과 동떨어진 교육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싱가포르 정부가 이슬람 국가의 오일머니 유치 준비에 나선 2006년부터는 금융회사들의 요청에 따라 이슬람 금융 관련 수업이 개설되기도 했다.

○ 새로운 시장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이슬람 금융은 금융 강국 싱가포르가 새롭게 눈을 돌린 분야다. 오일머니로 불리는 이슬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일찌감치 제도를 정비했다. 다른 채권과는 달리 이슬람 채권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DBS, UOB와 함께 싱가포르 3대 은행 중 하나인 OCBC는 2008년 이슬람 금융만을 담당하는 ‘OCBC 알아민’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OCBC 알아민의 시드 압둘 아지즈 최고경영자(CEO)는 “OCBC는 15년 전부터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 금융 상품을 내놓았고,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싱가포르에서도 본격적인 이슬람 자본 유치에 나섰다”며 “법 개정, 인력 양성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슬람 금융 상품을 통해 첫해에 1700만 달러의 이익을 거둔 OCBC 알아민은 2009년 30%, 2010년 38%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아지즈 CEO는 “탄탄한 싱가포르의 금융 시스템을 기반으로 이슬람 원칙에 어긋남 없이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해준다는 점이 오일머니를 움직였다”며 “다양한 인종이 한데 어울려 살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에도 익숙한 싱가포르 사회의 특징도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 ‘정부의 입김’은 없다

싱가포르 금융 산업의 특징은 정부가 직접 ‘플레이어’로 나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DBS의 윈스턴 럼 부사장은 “싱가포르 금융 산업 발전의 기반에는 정부의 다양한 지원이 있다”며 “다만 그 지원이라는 것이 한국 등 다른 국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정부의 입김’이라는 말과 다르다”고 말했다. 정부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과 금융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만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싱가포르 폴리테크닉은 금융 인프라 구축의 하나로 금융 인력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결과”라며 “이슬람 금융 역시 정부는 큰 틀에서 제도 개선만 할 뿐 개별 금융회사의 운영에 관여하는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추진 중인 마리나 베이 금융센터 구축도 같은 맥락이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금융회사들은 한국의 여의도에 해당하는 래플스 플레이스 근처에 모여 있는데, 싱가포르 정부는 조만간 이곳이 포화 상태가 될 것으로 보고 새로운 금융센터 구축에 나섰다.

럼 부사장은 “정부가 금융 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것은 비즈니스 코스트를 낮춰 더 많은 외국 기업과 자본이 싱가포르로 올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 씨티, HSBC 등 외국 금융회사들을 앞장서 유치한 이유 역시 ‘외국의 대형 금융회사와 경쟁하며 싱가포르 금융도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한국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 관계자는 “싱가포르의 특징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철저히 시장경제에 입각한 수요자 중심의 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이라며 “금융 허브를 꿈꾸는 한국도 이 같은 점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이슬람금융 유치, 한국은 국회서 ‘발목’

“특혜-테러자금 유입 우려”
채권 세금면제 법개정 무산


‘이슬람 채권(수쿠크)’으로 대표되는 오일머니를 잡기 위해 전 세계 국가들이 혈안이 돼 있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각종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석유라는 불변의 자원을 보유한 이슬람권 국가들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고(高)유가 덕에 오일머니는 더욱 풍부해졌다. 최근 카타르의 2022년 월드컵 대회 유치도 이 같은 오일머니에 힘입어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뉴욕, 런던, 싱가포르 등 각국의 금융 허브들이 오일머니를 내버려둘 리는 없는 노릇. 각국은 제도를 정비해 이슬람 금융 유치에 나섰다.

먼저 제도를 정비해야 하는 까닭은 이슬람 채권은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이자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자들에게 이자 대신 특정 사업에 투자해 얻는 수익을 배당금 형태로 지급한다. 예컨대 은행이 주택담보대출을 할 때 채무자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지 않고 은행이 자기 명의로 집을 구입해 채무자가 사용하게 한 뒤 임대료를 받는 방식이다. 이렇다 보니 이 과정에서 양도세, 부가가치세 등 기존 채권보다 많은 세금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는 세법을 개정해 이슬람 채권 발행 시 세금이 두 번 부과되는 일이 없도록 했고, 은행들이 이슬람 금융상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은행법도 고쳤다. 미국은 이슬람 채권 발행에 따른 이중 과세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실물 자산의 ‘소유권 이전’을 ‘수익권 이전’으로 해석했다.

우리 정부 역시 오일 머니를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말 국내법상 채권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슬람 채권에 취득·등록세 등을 면제해 주는 내용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추진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슬람권에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외화 채권들과 같은 혜택을 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회의 벽에 부딪혀 법 개정은 일단 좌절됐다. 조세소위까지는 별 이견 없이 통과됐지만 상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보류된 것. 일부 의원은 “이슬람 채권은 순수한 채권이 아닌데 모든 세금을 일괄 면제해주는 것은 지나친 특혜다” “테러자금으로 유입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윤증현 재정부 장관이 나서 “외화 차입처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외화 채권들과 이슬람 채권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슬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각국이 뛰고 있는데 우리만 뒤처지는 상황”이라며 “다음번 정기국회에서라도 반드시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