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뜬 기분에 흘러가는 연말연시
때론 반짝이고 때론 지리멸렬한 일상의 조각 속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각오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그러느라 아까운 현재는 철지난 별책부록처럼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 아는 분이 시간을 쪼개 송년 e메일을 보내주셨는데 거기에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대사가 적혀 있다. 영겁의 생명이 보장된 천사의 직분을 버리고 사랑을 위해 인간의 유한한 삶을 선택한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정신적 존재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어. 더 이상 영원한 시간 위를 떠도는 게 아니라 매순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 ‘지금’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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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그날 같지만 내 몸 하나만 들여다봐도 똑같은 하루는 없다. 잠시 잊고 지내도 손톱이 자라 있고 앞머리는 어느새 덥수룩하다. 최근 어느 전시장에서 접한 옛 한시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내일 또다시 내일, 내일은 어찌 그리 많은가/나는 평생 내일을 기다려 모든 일을 헛되게 보냈네.’ 삶의 무게는 비록 버겁지만 이미 흘려버린 날에 연연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날에 거창한 기대를 걸기보다 찬란한 지금을 느끼며 살고 싶다. 남아 있는 나날 가운데 내가 가장 젊은 날은 바로 오늘이기에.
‘결국, 모든 시간은 모래가 될 것이다/한없이 느린 거북 등의 해시계를 본다/나뭇가지가 길게 뻗어와 시간의 방향을 가리킨다/서둘러야 한다. 사막은 끝이 없다/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의 허리가 점점 가늘어 진다/끊어질 것만 같다 서둘러야 한다.’(송찬호의 ‘소금의 말’)
한 해 내내 바빴던 사람들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느라 더욱 바빠진 송년의 시기. 내게 주어진 365일은 한결같건만 더 쫓기는 몸과 더 번다해진 마음으로 엉거주춤 사는 듯한 요즘이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더 절실
묵은해와 새해라는 인위적 구분의 번잡한 소용돌이에 꺼둘리며 과거와 미래에 붙들리는 것은 불안하고 허전해서일 것이다. 그럴수록 내 앞에 펼쳐지는 삶에 집중하고 싶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오늘을 경이롭게 사는 것. 한 해를 산뜻하게 배웅하고 맞이하는 선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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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