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때 묻은 나이’에 이른 장년의 시인.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 잘될 때도 있지만 나쁜 사람이 잘 먹고 잘살기도 한다는 걸 안다. 정도의 차는 있어도 일반적으로 ‘나쁘다’라고 일컫게 되는 사람이 49% 존재하고 그 대신 착한 사람이 51%를 차지한다는 게 그가 내린 현실적 판단이다. 그래도 2%의 격차 덕에 세상이 이만큼이나마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믿는 시인은 아무리 고달파도 올바르게 살고자 마음먹은 51%를 응원하기 위해 쓴 책의 제목을 ‘착한 책’이라고 붙였다.
‘정의’ ‘김탁구’에 열광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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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책과 드라마에 그토록 열광했던 마음은 어쩌면 정의가 강물처럼은 아니더라도 제법 잔잔하게 흐르고 지금처럼 모지락스럽지 않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한국인의 공감대가 형성돼 가는 신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변화를 희구한다면 남에게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 똑같은 변화의 노력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편법과 반칙이 없는 사회를 소망한다면 우선 세상을 헐뜯는 수준을 넘어 이를 거들거나 방관한 나를 기꺼이 되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리일 터다. 자기를 들여다보기 싫은 사람은 남의 일을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본다고 한다. 나만 정의고 너는 정의롭지 않다, 나는 착하고 너는 나쁘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했고 너희 동네 사람들은 잘못했다, 우리 당은 다 맞고 너희 당은 다 틀렸다. 이런 사고야말로 공정사회를 가로막는 해묵은 장애물이 아닌가.
남탓 아닌 나부터 되돌아봐야
정의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어려운 숙제를 시작하기 전에 정의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보고 싶다. 나는 정의로운가.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이분법적 사고로 나와 우리 편만 봐주며 일상을 꾸려가는 나는 공정한가. 이기심이 똬리를 튼 나의 거친 생각과 용서받기 힘든 언행이 타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길 때 나는 정의사회 구현을 돕는 사람인가, 훼방꾼인가.
‘이 세상 후미진 곳에서/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사람이 있나 보다/용서할 수 없음에 뜬눈의 밤이 길고/나처럼 일어나서/불을 켜는 사람이 있나 보다/…/나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보다/용서받지 못할 일을 내가 저질렀나 보다/그의 눈물 때문에 온종일 날이 궂고/바람은 헝클어진 산발로 우나 보다/그래서 사시철 내 마음이 춥고/바람결 소식에도 귀가 시린가 보다.’(이향아의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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