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위원장은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조직담당서기, 중앙군사위원에 임명돼 당내 제2위의 자리를 굳혔다. 1991년에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번에 김정은은 인민군 대장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동시에 취임했다. ‘당에서 군으로’라는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제 와서 44년 만에 당 대표자회를 연 것일까. 군이 강력해져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김정은 후계체제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노동당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의 정상화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민군을 통제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부활해 김정은이 부위원장에 취임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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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김정일이 30세도 안 된 셋째아들 김정은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지명했고 여러 보장조치를 통해 ‘3대 세습’을 강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의존 그리고 확실한 후계체제 구축은 김정은 체제가 확립되기까지 과도기의 3대 방침이다.
김정은이 등장했다고 해서 북한의 기본정책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두 형과 달리 그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독재자의 자질을 갖춘 원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책이 채택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김정은의 정책이라기보다 김정일의 정책이다.
그렇다고 해도 ‘천안함’ 침몰사건 이래 북한의 강경정책이 앞으로 계속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북한대사의 유엔 연설에서 보듯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또 최태복 서기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 측에 대표자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지지를 구한 것처럼 중국 의존도 여전하다. 그러나 북한의 강경정책은 정점에 이르면 반드시 유연정책으로 전환하는 게 김일성 시대 이래의 관행이었다.
따라서 10일 노동당 창건기념일 퍼레이드에서 군사력을 과시하고 25일 중국군 참전 6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후 북한의 대외정책이 유연한 대화노선으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도발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북한과의 교섭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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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