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가운데에는 2050년까지 살아 있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잊지 말고 먼지 덮인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내 예측을 당신이 살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보기 바란다. 당신은 아마 내 아이들, 혹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정감록’이나 역술서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세계적 권위의 정치학자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교수가 신간 ‘프리딕셔니어, 미래를 계산하다’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게임이론을 통해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해왔다. 공개적 예측을 잘 하지 않는 학계의 관행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학자다. 특히 그처럼 이미 석학의 반열에 오른 학자로서는 더욱 부담스러운 일이다. 예측이 맞더라도 크게 나아질 것이 없지만 틀릴 경우 본인의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되기 때문이다.
게임이론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교수는 “미래는 현재의 행위자들이 상호작용해 생기는 커다란 흐름, 즉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그는 어떻게 미래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을까. 브루스 교수의 예측방법에서 중요한 출발점은 바로 ‘합리성’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벨기에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 기여한 위대한 입헌군주 레오폴드 2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국내에서는 선량한 군주였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 독재자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저자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치체제가 발달해 군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벨기에에선 선량한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콩고에서는 악랄한 제국주의자로서의 얼굴을 마음껏 드러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북한의 김정일 역시 저자가 보기엔 자신의 카드를 매우 영악하게 사용하는 게임 플레이어다. 김정일은 핵무기라는 유일한 무기를 절대 포기하지는 않을 테지만 섣불리 그것을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10억 달러 정도를 그에게 주어서 관리해나가는 게 최선이라는 저자의 파격적인 충고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처럼 브루스 교수의 예측모델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대한 객관적인 인정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기심은 이타심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남 돕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타적 행위 자체가 이기적 행위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기심의 반대 개념은 오히려 ‘위선’이다. 위선이라는 가면을 벗겨야 예측이 쉽다는 의미이다. 실제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시된 실험에 따르면 강의실에서 돈봉투를 발견했을 때 주인에게 돌려준 비율은 이기심을 전제로 하는 강좌의 수강생들이 이타심을 당연시하는 강좌의 수강생들보다 더 높았다. 이기심을 인정할 때에만 현실이 명철하게 보인다는 철학이 이 책엔 깔려 있다.
다만 의뢰인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익명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부분이 다소 흥미를 줄인다. 저자가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할 전문적 프로그램 내용은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일종의 ‘영업비밀’을 저자에게 그냥 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책에서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전제하다 보니 혹 독자들이 저자의 인간성에 대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론은 이론일 뿐, 인간성을 오해하지는 말자. 나는 미국 유학 첫해에 브루스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시간에 이런저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는데 몇 달 후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에 실은 논문에서 그는 나의 발언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적어놓았다. 노벨 정치학상이 있다면 수상했을 세계적 석학이 젊은 대학원생의 견해에 그토록 정중하게 감사를 표한 데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브루스 교수로부터 깊은 학문적 은혜와 많은 경제적 배려를 받았다. 그는 나뿐 아니라 국적에 관계없이 사정이 어려운 제자들을 많이 도운 자비로운 스승이었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