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소재와 상상력 가득부귀-장수 소망 담은 민화의 재발견문학작품을 수놓은 이야기그림병풍-두루마리로 읽는 재미 더해
◇이야기 그림 이야기/이종수 지음/236쪽·1만6000원·돌베개
1996년 스페인 국왕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전통 그림을 보고 싶어 한 소피아 왕비는 서울 인사동에서 민화를 접했다. 왕비는 여러 그림에 관심을 보인 뒤 호랑이 그림을 가져갔다.
2001년 10월부터 석 달간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한국의 향수’라는 이름으로 민화 전시회가 열렸다. “민화의 색감, 풍부한 이야기, 생동감 등이 놀랍다”는 평가부터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가까지 좋은 반응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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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춘향전’에 나타나는 춘향의 집에 대한 묘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춘향의 집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쪽 벽에는 도연명이 배를 띄워 선양으로 향하는 그림, 서쪽 벽에는 유비가 제갈공명을 모시러 가는 그림이 있다. 북쪽 벽에는 ‘구운몽’의 육관대사 제자 성진이 팔선녀를 만나 수작하는 그림이 있다. 여기서 보듯 당시 여염집에는 이런 그림이 빈틈없이 자리했다.
왕실과 일부 지배계층이 배타적으로 즐겼던 그림이 어느 순간 널리 유포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경제력이 있다. 경제력을 갖게 된 신분 낮은 부자들이 집을 장식할 그림을 필요로 한 것이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무명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민화 속 호랑이는 눈을 부릅떴다고 화가 난 게 아니고, 입을 쩍 벌렸다 해서 악당이 아니다. 온순한 눈빛, 재미있는 표정, 때론 어벙하게 웃는 모습이 친숙하기만 하다. 우리민화협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민화작가 서공임 씨의 작품 ‘한국인의 얼굴’. 그림 제공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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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보다 더 큰 관심은 장수였다. 대형 그림인 십장생도는 소장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 때문에 작지만 의미가 충실한 그림이 널리 유통됐다. 국화와 구기자가 어우러진 그림 ‘기국연년(杞菊延年)’은 장수를 의미했고 소나무와 국화가 어우러진 그림 ‘송국유존(松菊猶存)’은 만년에 유유자적하면서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민화의 또 다른 매력은 자유분방함이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생략했고, 크게 작게 화려하게 표현했으며 비틀고 왜곡했다. 산보다 더 큰 나무, 나무보다도 더 큰 학이 그림에 등장했다.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는 호랑이를 꼽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호랑이 그림은 대부분 18, 19세기에 그려졌다. 이때 호랑이 그림이 급증한 것은 사회 전반의 물질적 풍요 때문이다. 가족의 안녕과 재산을 지켜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호랑이 그림이 양산됐다. 무명작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은 과장된 눈, 과도하게 벌어진 입, 불쑥 튀어나온 이빨 등 자유로운 묘사가 특징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 들어 민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정규대학 과정을 거친 화가들이 민화를 소재로 차용하고 있으며 민화에 경직된 반응을 보이던 미술대학 교수들까지 민화를 다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 민화가 관심의 대상이 된 배경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알고 싶어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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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그림’을 담는 형식은 두루마리 형태인 ‘권(券)’ 외에 ‘축(軸)’ ‘병풍(屛風)’ ‘삽화(揷畵)’ 등이 있다. ‘축’은 한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한 것으로 걸어놓고 음미하기에 좋다. 동진의 유명한 문사 도잠(陶潛·365∼427)의 시문 가운데서 지명도가 높은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는 그림의 좋은 소재였다. 겸재 정선은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면서 ‘병풍’ 형식을 택해 ‘귀거래도’를 탄생시켰다.
동양화의 많은 작품은 이처럼 텍스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저자는 “옛 그림을 어렵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옛 그림은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면서 “그림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