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암동 6·25 반공포로촌의 마지막 생존자 이희수 옹강제로 입대후 국군에 자수수 용소선 “南가면 죽음” 협박145명 모여 살다 죽고 흩어져아내와 이 집서 끝까지 살거야
이희수 옹이 22일 반평생을 살아온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반공포로주택촌을 바라보고 있다. 낮은 판자지붕 뒤로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에 들어선 고층빌딩이 보인다. 홍진환 기자
21일 찾아간 반공포로촌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차는 좁은 골목들로 나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 반공포로들도 대부분 사망하거나 이사했다. 이제 남은 실제 반공포로는 이희수 옹(89)뿐이다. 이날 집 앞 골목에서 만난 이 옹은 오른팔에 너덜너덜한 파스 두 장을 붙인 채 리어카에 실린 파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 키보다 낮은 대문을 지나 들어선 이 옹의 집은 66m²(약 20평) 남짓했다. 작은 마루와 낡은 화장실, 방 2개가 전부였다.
38선 이북이었던 경기 장단군 강산면이 고향인 그는 21세 때인 1942년 서울로 와 미장일을 배웠다. 1년 뒤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고향 땅에 논과 밭을 샀다. 기쁜 세월도 잠시. 갑작스레 공산 세력이 들이닥쳐 재산을 몰수했다. 29세가 되던 1950년엔 총을 든 군인들이 찾아와 전쟁에 합류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고 몰겠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입대했다. “인민군이 대구 팔공산까지 내려갔다가 한창 후퇴할 때였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더는 고향에서 못 살 것 같아 강원 평강군에서 국군에 자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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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부산포로수용소에서 진행된 포로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남한행을 선택했다. 자유는 되찾았지만 가족과 재산 모두 두고 온 탓에 1953년 석방 이후 당장 갈 곳도 막막했다. 품이나 팔고 살자는 생각으로 찾아간 곳이 지금의 은평구 수색동. 동네 부잣집에서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부인 장경규 할머니(75)를 만나고 아들도 낳았다. 큰아들이 첫돌을 갓 넘겼을 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상암동에 반공포로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단지를 만든다고 했다. 이 옹은 목수 경력을 살려 공사에 자원했다. 자신의 집을 포함해 총 7개동을 직접 지었다. 같은 반공포로 출신인 김광수 옹(78)도 1958년경 이곳에 정착해 50여 년을 살다 최근 인근으로 이사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나온 젊은 반공포로가 갈 곳이 없어 세종로 한복판 천막 안에서 먹고 잤다. 그러던 중 자유당에서 반공포로청년자활회 측에 집을 주겠다고 제안해 상암동 반공포로주택 1462번지로 이사했다. 당시 기억에 윗동네에 9개동 45가구, 아랫동네 50개동 100가구로 나뉘어 반공포로 총 145명이 모여 살았다”고 증언했다.
현재 반공포로주택에서 부인과 살고 있는 이 옹은 앞으로도 이사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준 게 딱 두 가지야. 이 집,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준 금배지. 금배지는 잃어버려서 이제 남은 건 집뿐이야.”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