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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소통]‘국민화가 박수근 45주기展’ 최대 규모 45점 한자리에

입력 | 2010-05-04 03:00:00

‘이웃집 아저씨’가 그린 골목길 이웃 풍경




《“이 다음에 커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강원도 시골에 사는 열두 살 소년은 밀레의 ‘만종’을 본 뒤 간절히 기도한다.

곤궁한 형편에 학력은 국졸에 그쳤으나 온 마음을 다한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역경 속에서 독학으로 화가의 꿈을 이룬 것이다.

무명 저고리를 입은 아낙네, 아이들로 왁자지껄한 골목길, 노점상이 늘어선 동네 어귀.

화강암처럼 질박한 화면에 단순화된 선과 구도로 표현한 일상과 서민의 삶에 웅숭깊은 감성이 물결친다.

괴팍한 예술가의 광기와 거리가 먼 화가의 성실한 생애가 그렇듯 그의 작품은 소박함의 위대함을 묵묵히 대변한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믿은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은 소박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마련한 서울 창신동 집에서 아내, 딸과 자리한 화가의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방 하나는 세를 주고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도 화가는 아내에겐 다정한 남편, 자녀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사진 제공 갤러리 현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화가 박수근(1914∼1965)의 말이다. 그는 서구미술의 단순 모방이 아니라 한국인의 감성과 정서에 밀착된 자신만의 고유 어법을 완성한 가장 한국적인 화가다. 1953년 국선 입선작부터 도록으로만 접했던 작품까지, 한자리에 모으기 힘든 유화 45점을 모은 전시가 마련된다. 7∼30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국민화가 박수근 45주기’전. 발품을 팔아 최대 규모의 전시를 성사시킨 박명자 대표는 “집에 차 한 대 없이 박수근 그림을 껴안고 살아온 컬렉터도 작품을 내주었다. 다시는 이만큼 모으기 힘들 것 같다”고 털어놓었다. 뒤늦은 감은 있어도 화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첫 단계로 영문 화집의 출간을 기념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고난 속에서도 순박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빛나는 전설로 승화시킨 그림들. 일제강점기와 전쟁, 사회적 격변과 보릿고개 등 모진 세월을 견뎌온 착한 한국인의 초상을, 시대의 진실한 내면을 만날 기회다. 3000∼5000원. 02-2287-3500

○ 아버지 박수근

“소처럼 성실하셨고 흙처럼 소박하게 사셨던, 이웃집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분. 질곡의 세월을 살면서도 세상을 탓하지 않고 늘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곤 하셨다. 눈 오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련을 또 다른 자연의 순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화가의 아들 박성남 씨(63)의 회고다. 아버지의 투박한 그림에서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고3 때 열린 유작전에서 ‘시장의 여인’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그리지 않고 여인이 인내한 세월의 주름까지 그렸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믿었던 화가의 삶과 예술은 일치한다. 그래서 아들에겐 추억이 무궁무진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개서 농 속에 차곡차곡 넣은 뒤 마루를 걸레질하고 마당을 쓸던 아버지. 과일을 살 때면 가난한 행상들에게서 고루 사주셨던 아버지. 아내와 자식들이 옹기종기 누워 자던 단칸방에서 늘 윗목만 고집하던 아버지.

“서민을 그린 아버지의 작품이 금고에 갇혀 숨도 못 쉰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문턱 낮아진 전시에서 많은 이가 아버지의 생활과 체온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 화가 박수근

 박수근이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집 부근의 풍경을 그린 1950년대 작품 ‘골목 안’.

“한국인들이 겪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살았던 그의 그림에는 각박한 현실의 느낌이 드러나면서도 그것을 감내하는 인내, 단순하면서도 정직한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김영나 서울대 교수)

평생 가난을 벗 삼은 화가의 그림은 이제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언급된다. ‘빨래터’의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에 이어 위작 시비도 벌어졌다. 하지만 예술가 정신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작품 외적인 일이 그의 예술을 가릴 순 없다. 갓난 동생을 업은 어린 소녀의 옆얼굴, 행상을 끝내고 돌아가는 어머니들의 발걸음에 우리의 정서적 DNA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기 저기 거기 중 ‘여기’를 그렸고 과거와 미래를 그린 게 아니라 ‘현재’를 그렸다. 그런 명명백백함, 단단함이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박성남 씨)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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