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거려도 소통 없으면 공허
우리 집 설 풍경은 단출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편이다. 여동생 둘이 결혼한 뒤로는 부모와 나, 이렇게 셋이 차례를 모시고 데면데면하게 앉아 떡국을 먹는 걸로 아침이 끝난다. 막내동생은 오후가 되어야 친정인 우리 집으로 오고 한 동생은 도쿄에 살아 자주 못 온다. 저녁 전에 나의 작은아버지들이 잠시 들르는 게 유일한 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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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조카들이 안 자고 있으면 내가 방에 들어가서 으름장을 놓곤 한다. 그러면 다섯 살짜리 조카가 나에게 ‘큰이모, 우린 지금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요’, 짐짓 항변한다. 소곤소곤이라는 의성어도 ‘대화’라는 단어도 조카들이 싸울 때나 서로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주장을 할 때 내가 가르친 단어다.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도 올 설은 긴 술자리도 크고 작은 말다툼도 없이 지나갔다. 그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다툼 끝의 상처가 남지 않아서이고 섭섭하다고 느낀 것은 누구도 솔직하고 시원하게 자신의 이야기나 의견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같이 있으되 말하지 않는 것은 같이 있으면서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다.
사회현안도 정성껏 들어야 해결
나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일찌감치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친밀한 공존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은 필요하고 거기가 바로 ‘집’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구성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야기’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알아야 한다. ‘집’의 확대 개념이 곧 한 나라이고, 한 개인을 가족으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은 더욱 커진다. 세종시 문제 등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성껏 들으면 들리는 게 마음의 소리다. 정성껏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대화의 첫 번째 방법이기도 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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