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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하종대]“조국이 자랑스럽다”

입력 | 2010-01-20 03:00:00


지진 대참사로 최대 2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티. 남한 4분의 1 정도의 땅에 903만 명이 몰려 산다. 국토의 4분의 3은 산이다. ‘아이티(Haiti)’는 중남미 농경민족 언어인 아라와크 말로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1804년 중남미에서 처음으로 독립했지만 인구의 80%는 절대빈곤에 허덕인다.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85달러(환율 기준)로 하루 2달러에 불과하다.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나라인가 싶다. 지난해 3월 아이티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배우 예지원 씨는 “아이티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빈곤의 배경엔 역사적 이유도 있다. 아이티의 건국자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50만 명의 사탕수수 농장 노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독립을 쟁취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고자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프랑스는 무역봉쇄를 단행했고 여러 유럽국이 동참했다. 최근까지도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2008년 5월 8만7150명이 숨진 중국 쓰촨(四川) 지진을 직접 취재한 기자는 아이티의 참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티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자의 상상력을 뛰어넘었다. 거리에 널브러진 시신은 ‘인간 주검’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너무 끔찍해 신문에 싣지 못했지만 인터넷에서는 마치 구제역에 걸린 동물을 파묻듯 희생자의 시신을 구덩이에 부리는 트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도 극한의 생존 투쟁에 나서야 한다. 각국의 지원이 잇따르고 있지만 턱없이 모자란다. 구호품을 실은 트럭만 보면 이재민들이 줄서는 대신 폭도로 돌변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현지에 간 본보 유성열 특파원은 “취재를 하려고 해도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강도를 당할까 무섭기도 하지만 이재민들이 구호품을 얻기 위해 곳곳에서 차량을 막고 뒤지기 때문이다. 지진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록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이들을 탓할 수도 없다.

한국 정부는 아이티 지원 금액을 1000만 달러로 크게 늘렸다. 삼성, 현대, LG, SK 등 기업의 성금도 잇따르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컴패션 세이브더칠드런 등 지원단체는 물론 언론사도 성금 모금에 나서고 있다. 19일 현재 대한적십자사가 모은 성금만도 21억2724만 원(약정액 포함)에 이른다. 대한적십자사 김주자 국제협력과장에 따르면 “우리도 어려운데 왜 남의 나라까지 도와주느냐”며 항의하는 국민도 이제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이 지구 반대편 나라의 참상까지 돌볼 수 있는 것은 최근 반세기 동안 우리 국민이 피땀 흘려 경제를 일궜기 때문이다. 1인당 GDP가 100달러도 안 되던 1950년대 우리는 수치심도 잊은 채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어야 했지만 이제 1인당 GDP는 200배 넘게 늘었다. 1975년 신혼여행을 아이티로 갔던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평소 “아이티를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은 이제 경제성장의 모델인 셈이다.

2600여 년 전 중국의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첫 패자로 만들었던 관자(管子·일명 관중·管仲)는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늠,름)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고 말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얘기다. 반세기 전만 해도 타국 원조에 의존해 살던 대한민국이 이제 나라의 품격을 돌볼 줄 알게 됐다는 게 자랑스럽다.

하종대 국제부 차장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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