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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나라서 주는 나라로]엘살바도르 기술훈련지원사업

입력 | 2010-01-14 03:00:00

내전 폐허에 뿌려진 IT씨앗… ‘중남미의 한국’ 꿈꾼다




《중미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시. 산탄총을 휴대한 사설경비원이 상점과 식당을 지켰다. 건물들을 둘러싼 높은 벽과 철조망, 두꺼운 철문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산살바도르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중미기술훈련원(ITCA) 사카테콜루카 캠퍼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기관총을 멘 경비원이 좁은 정문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1980∼1992년 12년간의 내전 이후 계속되는 심각한 치안 불안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찰과 사법부를 믿지 못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거리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에 놀랐다”는 ITCA 직원 엑토르 놀라스코 씨의 말이 이해됐다.》
기술훈련원 첨단장비 지원, 컴퓨터 재활용센터 4월 완공
“IT 원조는 한국이 유일”… 산업역군 양성에 큰힘 보태


이런 곳에서 젊은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을까. 발걸음을 ITCA 중앙캠퍼스 안으로 옮겼다. ITCA는 엘살바도르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 출연 산학협동 교육기관이다. 매년 8만 명의 졸업생이 배출된다.

훈련원 내 첨단기술교육센터 메카트로닉스 강의실. 학생 루이스 푸엔테스 씨(22)와 사비에르 바스케스 군(18)이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축소한 시뮬레이션 장비의 작동 순서 설계에 여념이 없다. 설계를 마친 뒤 장비가 작동하자 모터의 연결, 전류의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이 장비들은 실제 자동화시스템과 똑같으면서 프로그래밍에 따라 어떤 작동 결과를 보이는지 학생들이 트레이닝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됐다.

이 훈련원의 핵심 교육과정인 첨단기술교육센터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2007∼2009년 생산자동화 실습 장치와 첨단 네트워크 장비(80만 달러)를 무상 지원해 설립됐다. 엘살바도르에서 이런 장비를 갖춘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곳에 입학하기 전 다른 공대를 졸업했다는 푸엔테스 씨는 “기계공학을 공부했지만 실습 한 번 제대로 못했고 산업 현장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고 말했다. 바스케스 군은 “내가 뭘 실수했는지 알 수 없는 구식 장비와 달리 한국의 최첨단 장비는 설계에 따른 작동 과정을 실감나게 연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상한 건 이들의 포부였다. 단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푸엔테스 씨는 “기업에서 시키는 일만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의 앞선 기술을 활용해 엘살바도르 기업 환경을 개선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프라인 히메네스 씨(21)는 “우리가 배운 기술은 수년 뒤 엘살바도르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장비를 무상 지원해 설립된 엘살바도르 중미기술훈련원(ITCA) 첨단기술교육센터에서 훈련원생들이 시뮬레이션 장비를 이용해 설계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 장비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축소한 트레이닝 기계다.

다니엘 코엔 훈련원 이사장은 “기업에 혁신을 제안하는 전문가로 학생들을 성장시키겠다”며 “이들은 엘살바도르 기술 경제의 중추가 될 제조업과 정보기술(IT) 분야의 선구자로 활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중미 최대의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했으나 오랜 내전 탓에 저개발국가로 전락한 엘살바도르. 젊은이들의 박탈감이 심각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훈련원 학생들에게서는 치안 불안과 마이너스 경제 성장(2009년 경제성장률 ―3.3%)의 상실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학생들은 한국이 지원한 첨단 장비로 엘살바도르의 재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 의욕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1970, 80년대 한국의 산업역군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카를로스 오로스코 학장도 “한국을 발전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김은섭 엘살바도르 KOICA 사무소장은 “엘살바도르인들은 한국인처럼 근면하고 적극적이어서 인프라만 제공되면 한국식 경제 기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KOICA의 무상지원은 훈련원을 넘어 엘살바도르 전국의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IT 미래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어떤 부분이 문제죠?”

다음 날 ITCA 중앙캠퍼스 내 컴퓨터 원격수리센터.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리고 헤드셋을 낀 훈련원 졸업생들이 원격제어시스템에 접속해 공립학교들의 컴퓨터를 수리해 주고 있었다. 수리센터는 KOICA가 장비를 무상 지원(70만 달러)해 2008년 세워졌다. 현재 엘살바도르 공립학교 5000곳 중 720곳(학생수 50만 명)에 혜택이 돌아간다. 올해 대상 학교를 1200곳까지 늘릴 계획이다. 에멜리나 차콘 교수는 “원격제어시스템은 지역 컴퓨터 전문가가 부족한 엘살바도르에서 혁명과도 같은 도움”이라고 말했다.

또 사카테콜루카 캠퍼스에는 KOICA가 무상 지원(268만 달러)한 컴퓨터 재활용센터가 4월 완공된다. 고물 컴퓨터를 새 컴퓨터로 재탄생시켜 전국 학교에 지원하는 곳이다. 재활용 서비스는 KOICA가 지원한 장비를 활용해 이미 지난해 8월부터 진행 중이다. 컴퓨터 1000대가 새롭게 태어났다. 프리니 살다냐 부총장은 “엘살바도르에서 독일 일본이 활발한 무상원조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IT 분야는 한국만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운영 노하우까지 성심껏 전수한 한국에 고마워했다. 리카르도 과드론 교수는 “한국 방문 연수를 통해 엘살바도르에서 접하지 못한 새로운 교육 방식을 배운 점이 크게 도움이 됐다”며 “그렇지 않았으면 장비가 무용지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레네 브루노 씨(26)는 “한국을 ‘경제만 발전한 나라’로 알았다. 첨단 장비와 선진 기술을 진심으로 공유하려는 모습을 본 뒤 ‘의식 있는 나라’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엘살바도르에서 ‘경제 부흥의 살바도르(스페인어로 ‘구세주’라는 뜻)’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 김밥 만들고 영화 JSA 보는 ‘한국의 친구들’ ▼

한국연수 마친 125명 모임


‘아미고스 데 코레아(Amigos de Corea·한국의 친구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한국 연수 프로그램을 마친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모임인 ‘아미고스 데 코레아(한국의 친구들)’ 회원들. 왼쪽이 회장인 밀톤 마가냐 외교부 아주국장이다.

2005년 엘살바도르 정부와 교육기관 관계자들이 결성한 단체의 이름이다. 회원 수는 125명.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가난한 초등학생을 돕고 황폐한 숲에 나무를 심는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한국 연수 프로그램을 마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하고자 만든 모임이다.

올해 활동계획을 세우기 위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카페에 ‘한국의 친구들’ 운영진이 모였다. 회장인 밀톤 마가냐 엘살바도르 외교부 아주국장은 “한국 문화를 함께 배울 뿐 아니라 ‘돕는 나라’ 한국처럼 모국에 기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매년 한 번씩 ‘작은 한국영화제’ ‘한국음식 배우기’ 등 문화행사를 연다. 지난해 8월 열린 ‘한국음식 배우기’는 엘살바도르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 비빔밥, 김밥을 함께 만들었다. 9월에 열린 ‘작은 한국영화제’에서는 코믹 영화 ‘가문의 영광’을 함께 봤다.

2007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함께 본 뒤에는 한국의 어두운 부분인 분단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를 본 뒤 ‘남북통일에 기여하겠다’는 성명을 작성해 KOICA에 전했다. 엘살바도르 내 한국계 기업을 방문하는 등 한인들과 교류도 넓히고 있다.

한국에서 받은 도움을 되새기며 그 정신을 엘살바도르 사회에 전파하는 일도 한다. 이들은 지난해 엘살바도르 소야팡고 시 ‘대한민국초등학교’의 가난한 학생 1명을 선정해 ‘한국의 친구들’이란 이름을 내건 장학금을 줬다. 학교 도서관에 책도 기증했다. 대한민국초등학교는 KOICA가 2007∼2008년 시설 개선을 지원한 학교다.

모임 회원인 네스토드 클라라 중미기술훈련원 교수는 “단발성이 아니라 그 학생이 원하는 제과 제빵 과정 연수를 마칠 때까지 보살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에는 장학금 대상자를 3명으로 늘려 장래에 훈련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마가냐 국장은 “언젠가 이 모임을 재단으로 하는 학교를 설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선진기술 전수에 감사… 한국대학과 교류 희망” ▼

엘살바도르 기술훈련원 총장

“중미기술훈련원 학생들도 꼭 한국에 가서 선진 기술을 배우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훈련원이 공대로 승격했으니 교환교수 프로그램 등 대학 간 교류도 가능할 겁니다.”

엘시 산토도밍고 엘살바도르 중미기술훈련원(ITCA) 총장(사진)은 “한국의 대학들이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훈련원 교직원 21명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지원으로 한국 연수를 다녀와 받은 감명을 앞으로 학생들도 느끼게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산토도밍고 총장은 “엘살바도르 기술과학을 책임질 젊은 인재들이 최상의 조건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그를 비롯한 훈련원 교직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KOICA로부터 지원받은 부분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했다.

산토도밍고 총장은 “한국이 냉장고 등 폐전자제품을 재활용해 상업화하는 아이디어가 뛰어나다고 들었다. 환경 분야의 기술도 배우고 싶다”며 “한국 학생들의 사회봉사활동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산살바도르(엘살바도르)=글·사진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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