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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무용가 최승희

입력 | 2009-12-02 03:00:00

美넘어 유럽-남미까지
20세기 최초 한류스타
“친일파” 비판에 월북



1930년대 전 세계를 오가며 한국 춤의 매력을 전파한 최승희. 당시 광고 모델로도 인기가 높았다. 동아일보 자료


《“무용가의 최고 사업기관인 ‘뉴욕메트로폴리탄 뮤직콤패니’로 하여금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인 전속무용가로 계약을 맺게 하얏다는 쾌소식이 도달되었다…. 최 여사는 6일 세계무용계의 ‘메카’의 땅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대무대에서 조선의 고전무용 형식에 담은 ‘승무’ ‘낙랑벽화’ ‘신라 궁녀의 춤’ 등을 공연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38년 2월 7일자》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1911∼1969?)는 20세기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춤추는 여자는 기생이나 무당’이란 인식이 지배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선구자이자 여성해방가였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의 내한공연을 보고 무용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이시이에게서 현대무용을 배운 그는 귀국 후 자신만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후원으로 단성사에서 1930년 창작무용발표회를, 1931년 신춘무용회를 열었다. 전국을 돌며 고학생과 재만(在滿)동포를 위한 위문공연, 수해민 돕기 자선공연을 열기도 했다.

1934년 그는 일본에서 승무 칼춤 부채춤 등 우리 전통을 현대화한 춤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무용가의 포부’에서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의 포부는 조선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한편 우리가 가진 특유한 무용예술을 세계에 진출시키는 데 잇습니다…. 조선의 춤을 소재로 삼고 그것을 자기의 예술적 기능으로 가능한 범위의 무용으로 양식화하기를 힘쓰려 합니다.”

1937년 12월 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최승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를 경영하는 메트로폴리탄 뮤직컴퍼니와 전속계약을 맺고 6개월간 전미 순회공연을 갖는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23회, 벨기에에서 9회, 네덜란드에서 11회, 독일에서 2회 공연했으며, 1940년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시작으로 61회의 중남미 공연을 펼쳤다.

1940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는 ‘지구 우를 달리는 세기무희 최승희, 남미까지 풍미’라는 기사로 최승희의 해외활동을 전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초립동 춤을 공연한 후 그의 초립동 모자는 파리에서 유행이 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피카소는 최승희를 그림으로 남겼고, 앙리 마티스, 찰리 채플린, 로맹 롤랑 등이 최승희의 팬이 됐다. 할리우드에서 영화출연 제의도 쏟아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 ‘황군’위문 공연을 다니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했던 그는 광복 후 친일파라는 비판에 직면한 뒤 월북했다. 김일성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려주며 그를 특별 대접했다. 그 후 남편 안막이 숙청의 덫에 걸린 뒤 1960년대 후반 최승희도 결국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 격동기에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지만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이 교차한 시대적 상황에 갇혀버린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최승희의 이름은 지난달 27일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내놓은 최종명단에서 다른 여러 월북인사들과 함께 빠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