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 ‘뺑뺑이’에 지쳐 증설 막막”“지자체 가보라” “법 바뀌었다” “우린 모른다”바뀐 공무원들 업무 몰라 민원설명 진땀도“현장 공무원, 바뀐 규제 반영하는지 감시해야”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공장이 있는 B사의 한 관계자가 정부의 규제로 증설을 하지 못한 채 1년째 비어 있는 공장 터를 가리키고 있다. 규제개혁추진단은 한 설문 조사에서 기업들의 규제개혁 만족도를 낮추는 가장 큰 요인으로 ‘공무원의 규제개혁 의지 부족’이 꼽혔다고 밝혔다. 안산=김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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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장님, 이거 안 되겠는데요. 보전관리지역에 어떻게 이런 설비를 세우셨어요?” “보전관리지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르셨어요? 작년에 법이 바뀌었어요. 여긴 모든 설비 신증설이 금지예요.” “아니, 내가 이 땅에서 10년 넘게 사업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누가 내 땅을 어쨌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건 친환경 설비입니다. 작년에는 환경부 장관까지 오셔서 설비 개발을 격려했다고요!”
“아무튼 안 돼요. 법이 그렇다니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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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고도 단단한 공무원의 벽
시청 공무원이 말한 법은 2003년 국토해양부가 국토의 난(亂)개발을 막기 위해 만든 ‘관리지역 세분화 지침’이었다. 이 법은 각 지방자치단체가 2007년까지 의무적으로 지역 내 땅(준농림지역 및 준도시지역)을 보전·생산·계획관리지역으로 나눠 난개발이 이뤄지지 않게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이 중 계획관리지역에만 공장 등 건축이 허용되고 나머지 두 지역은 공장 신증설이 엄격히 제한돼 순수 보전 혹은 농업생산만 가능하다.
김 씨의 공장 용지는 토지적성평가에서는 계획관리지역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용지 면적이 1만 m² 이하일 때는 인접 토지와 용도지역이 같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보전관리지역으로 바뀌었다. 보전관리지역에 있는 회사는 대표이사의 변경도 제한된다. 대(代)를 이어 회사를 물려주거나 제3자에게 팔수도 없다는 뜻이다.
“정말 행정편의적인 땅 나누기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35년간 일군 사업이 내가 죽고 나면 몽땅 ‘쓰레기’가 되겠더군요. 어찌나 허망하던지….”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김 씨는 시청과 중앙부처를 발로 뛰기 시작했다. 수모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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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주인도 모르게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시청 공무원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지했다”고만 짧게 말했다. 그가 말한 고지란 A4 용지 한 장에 규제 변경 공고를 적어 일주일간 시청 게시판에 붙인 것을 말한다. 기가 막힌 김 씨는 “매일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영세 중소기업인들이 한가롭게 시청 게시판이나 보고 있겠느냐”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보직 변경으로 담당 공무원들이 바뀌었다. 김 씨는 이전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새 담당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관련 법령을 ‘가르치면서’ 민원을 제기해야 했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1년을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며 “새 설비로 제2의 도약을 꿈꾸던 올해가 그냥 가 버릴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 현장 공무원 어깃장에 규제개혁 무산
자동차 폐배터리에서 납을 추출해 제련사업을 벌이는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의 B사도 1년째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B사는 공장 옆 용지 1만579m²(약 3200평)를 새로 사 설비를 확장하려 했다. 원래 B사는 특정물질 사용업체의 증설을 제한하는 경기도공단환경관리사업소의 환경규제에 막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친환경 설비를 구축해 오염물질 배출을 줄인 업체에 대해서는 공장 증설을 허용한다는 지식경제부의 방침이 나오면서 증설의 길이 열렸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공단 내 기업들에 “드디어 규제를 풀었다”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이에 고무된 B사는 투자를 서둘렀다.
하지만 공장 증설 허가 요청서를 들고 안산시를 찾은 B사는 ‘공무원의 어깃장’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중앙정부의 발표와 달리 지자체는 규제를 완화할 의지가 없었던 것. 더욱이 지역주민들의 민원을 우려한 공단환경관리사업소는 지침을 개정해 환경규제를 강화하기까지 했다.
○ 소통 없는 개혁은 실패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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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추진단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규제개혁 만족도 조사에서 ‘공무원의 규제개혁 의지 부족’(65.2%)이 가장 큰 문제로 꼽혔다.
하지만 성급하게 추진하는 규제개혁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행정전문가는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지 않고 규제를 푸는 데만 급급할 경우 지역사회 갈등 등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정책 엇박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균형감 있는 규제개혁을 추진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안산=김용석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