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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한기흥]‘검은돈’ 줄여 가기

입력 | 2009-04-27 02:58:00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힘들다. ‘검은돈’으로부터는 어느 정치인보다 자유로운 듯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아닌가. 그런 그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의 금품 수수 의혹과 관련해 검찰 출두를 앞둔 아이러니라니….

우울한 마음으로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본다. 독재와 쿠데타, 이념갈등으로 뒤틀린 세월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국민이 피눈물을 흘린 광정(匡正)의 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한숨과 탄식의 기억이 낙관과 안도의 기억보다 많다. 하지만 그래도 위안인 건 한국 정치가 큰 틀에선 계속 전진해온 점이다. 평화적 정권교체로 상징되는 제도적 민주주의의 완성도 그렇거니와 정치판도 과거보다 맑아진 게 사실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1987년 대선에서 각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선거비용은 노태우 130억 원, 김영삼 53억 원, 김대중 48억 원, 김종필 16억 원이었다. 그러나 여야 후보가 서울 여의도에서 초대형 유세를 경쟁적으로 벌이고 금품 살포가 기승을 부린 당시 선거판에 뿌려진 돈은 실제론 조(兆) 단위였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대부분 기업이 갖다 바친 돈이었음은 물론이다. 1992년 대선 때도 각 후보의 선관위 신고액은 김영삼 284억 원, 김대중 207억 원, 정주영 220억 원이었지만 민간 연구소들이 추정한 대선자금은 1조∼2조5000억 원이나 됐다.

반면 2007년 대선 때 선관위 신고액은 이명박 372억4900여만 원, 정동영 390억7000여만 원, 이회창 138억5000여만 원이다. 이에 대해선 별다른 의혹 제기가 없었다. 이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9698억 달러, 수출액은 3714억8908만 달러로 1987년의 GDP 1401억 달러, 수출액 472억8000만 달러에 비해 각각 6.9배와 7.8배 정도 늘었지만 대선자금은 오히려 조 단위에서 수백억 단위로 줄었다.

지난해 4월 18대 총선에선 유권자들에게 약간의 향응을 제공했다가 엄격해진 선거법 때문에 금배지를 떼였거나 떼일 처지에 놓인 의원이 여럿이다. 이젠 선거에서 함부로 돈질을 하다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패가망신하기 마련이다.

정치판의 탁도(濁度)가 이만큼이나마 나아진 것은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비용 저효율’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지구당 폐쇄, TV 토론회 도입 등의 제도 개선이 꾸준히 이뤄졌고, 선거법 정치자금법 등의 정비로 정치권 돈 흐름의 투명도도 높아졌다. 금융실명제 도입과 선거사범 수사가 검은돈의 추적과 차단에 기여한 바도 크다. 2002년 대선 때의 ‘차떼기 사건’과 그 후 드러난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 사건 등은 정경유착에 대한 사회적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박연차 사건이 보여주듯이 권력과 돈의 은밀한 결탁은 좀처럼 근절하기 어렵다. 법망(法網)을 조여도 검은돈은 그 틈새를 비웃듯 빠져나간다. 감시의 눈을 더 부릅떠야 한다. 한국 정치를 부패의 수렁에서 건질 수 있는 건 결국 국민뿐이다. 국회에선 각종 정치자금을 엄격히 규제한 ‘오세훈 법’을 완화하자는 개정론이 슬금슬금 머리를 들고 있다. 그래도 될 만큼 정치권의 윤리 의식이 높아졌는가. 검은돈을 추방하려면 정치인들이 계속 불편을 느끼게 하는 게 옳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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