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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떠나자]7일간 타는 하얀 산불

입력 | 2009-03-19 14:17:00


섬진강이 가로지르는 전남 광양시 일대의 산들은 요즘 온통 하얗게 불타고 있다. 사방에 활짝 핀 매화(梅花) 덕분이다. 황사가 심했던 17일에도 중국산 모래먼지는 하얀 매화 빛을 가리지 못하고 매화 핀 곳을 피해 누렇게 하늘을 방황하고 있는 듯 했다.


매화는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1주일 정도 산을 하얗게 물들인 뒤 사라진다. 이 때문에 '하얗게 타는 산'을 보기 위해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다.

서울역에서 광양시까지 거리는 약 390㎞. 고속도로 국도를 번갈아 타며 차량으로 이동하면 약 5시간 반에서 6시간이 소요된다. 당일 여행지로는 적당하지 않은 거리.

하지만 기차를 타면 하루 동안 매화 향과 빛을 만끽할 수 있다.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 구경은 덤이다.


▲동아닷컴 이철 기자

●노는 칸, 쉬는 칸 따로 따로

매화꽃 구경으로는 코레일과 현대드림투어가 마련한 '섬진강 매화꽃' 패키지를 추천할 만 하다.

현대드림투어는 현대백화점 계열사. 그간 백화점 고객들을 대상으로 해외여행 상품 개발에 주력해 왔으나 최근 환율이 오르면서 국내 여행 패키지를 내놓기 시작했다. 17일 출발한 '파랑새 기차여행-섬진강 매화꽃'은 그 첫 상품이다.

구례구역행 열차는 이날 오전 7시 25분 서울역을 출발했다. 일반 새마을호나 무궁화호의 일부 객실을 전세 내는 다른 여행상품과 달리 파랑새 기차는 8개의 객차가 모두 패키지 이용객 전용이다. 열차 외부도 여행 테마에 맞게 새로 도색했다.

역 전광판에는 '구례구역 행 무궁화호'로 표시되지만 일반 승객은 타지 못한다. 종종 정차역에서 '구례구역 행 무궁화호'를 타려는 승객들이 잘못 알고 열차에 올랐다가 승무원의 안내로 다시 내리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구례구역 도착 예정 시각은 오전 11시 50분. 4시간 동안 객차 안에 앉아 있으면 지루할 법 하다. 하지만 패키지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프로그램'. 여행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여행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아이디어를 짜낸다.

이날 승객의 대부분은 40~60대 여성과 일부 남성. 열차 이름에 어울리는 이문세의 '파랑새'를 시작으로 중 장년층의 귀에 익은 이른바 7080 음악이 적당한 음량으로 흘러나왔다.

오전 10시경. 음악도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쯤.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의 안내방송이 승객들의 귀를 쫑긋 세운다. "6번 객차에서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관심 있는 승객들은 6호 열차로 모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6호 객차의 인테리어는 특이하다. 창을 등지고 앉게 돼 있는 의자는 접이식. 평상시 접혀 있을 때는 열차 바닥 전부를 '놀이터'로 쓸 수 있다.

이날 6호 객차에서는 노래실력이 뛰어난 가이드 한 명이 컴퓨터 반주에 맞춰 통기타를 치며 흥을 돋웠다.

미리 파란색 가발을 준비해 온 한 관광객이 벌떡 일어나 객차 한 가운데로 나서 몸을 흔들자 객차 안은 순식간에 파티 장으로 분위기 반전.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놀아보겠어?"라며 박수치며 환하게 웃는 관광객들의 표정에서 일상을 탈출한 기쁨이 그대로 묻어난다.

'노는 칸'과 '쉬는 칸'을 철저하게 분리해 운영하기 때문에 6번 열차를 제외한 나머지 객실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스타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닌텐도가 더 좋아요."

함께 온 여성 승객 4명은 "평소 우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지시에 시달리는 업종에 일한다"며 "쉬러 와서도 지시에 따르기 싫으니, 꼭 필요한 내용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고 직접 우리에게 말하지는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얗게 불타는 산으로

구례구역에 11시 50분에 도착했다. 이 곳부터 오늘의 목적지인 청매실농원까지 거리는 약 38㎞. 이동 수단은 45인승 관광버스였다.

선진강변을 따라 나 있는 길을 따라 시속 50~60㎞로 유람하듯 달린 버스는 약 40여분 만에 청매실농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평일이니까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면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듯했다. 청매실 농원 2, 3㎞ 앞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때 8대의 버스 중 제일 선두로 가던, 기자가 탑승한 8호차의 가이드 임상수(48) 명인방 투어 대표의 입심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길 주위에 노점상이 내놓은 '섬진강 벚굴' 과 길 옆 식당 메뉴판의 '재첩국'과 섬진강의 생태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구수한 말투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 대표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직접 독립영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퐁네프의 연인들'(1991년), '레옹'(1992년) 등을 수입, 배급한 경력도 있는 '문화 예술인'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사이, 매실농원 입구에 버스가 도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장 경비 요원들이 "이곳에서부터는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며 차를 막았다. 아닌 게 아니라, 농원 안에도 주차장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관광버스들 수십 대는 모두 섬진강 둔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익살스러운 가이드 임 대표가 "여러분, 저희가 정말 들어가면 안 될까요? 우리의 끗발을 보여줍시다"라며 차에서 내린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대화가 오고 가는 듯 하더니 경비요원이 순순히 버스 진입을 돕는다.

임 대표가 버스에 다시 오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과연 그의 '끗발' 이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농원 측에서는 아침부터 버스 8대 자리를 비워놓고 파랑새 기차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 위에는 '파랑새 기차여행, 청매실 농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도 걸려있었다.

미리부터 코레일 현대드림투어와 약속이 돼 있었던 것. 하지만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관광객들은 알아도 모르는 척, 빙긋이 웃고는 질서 지켜 버스를 내려서 농원으로 향했다.

농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경. '매화산도 식후경'. 일행에게 '매실소스 비빔밥'(5000원)이 제공됐다.

청매실 농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매실을 식품화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실을 발효시켜 각종 음료와 반찬, 술을 상품화 했으며 소화를 돕는 기능이 제품에 모두 녹아 있어 대 히트를 쳤다.

창업자인 홍쌍리 씨(67)는 1965년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섬진마을) 밤나무골로 시집왔다. 부자였던 시댁이 망하고 빚쟁이들이 남겨준 비탈진 산을 매화 동산으로 가꿨다. 매실 농장을 하면서 매실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매실을 발효시키는 적당한 조건을 발견해 냈다. 1994년 매실전통식품제조업 허가를 받았으며, 1997년에는 정부지정 전통식품 명인으로 인정받았다. 현대식 경영기법을 농장 경영에 접목해 매실 농장을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중견 기업으로 키워냈다.

홍씨는 농장 근처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동네 잡상인들을 내쫓지 않는다. 오히려 타 지역 장사꾼들에게 동네 사람들이 자리를 빼앗길까봐 경호원을 고용해 이들을 보호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광양 경제는 홍씨 혼자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천막치고 야외에서 조리를 하지만 조리사들의 복장은 대기업 급식업체와 다를 바 없다. 음식을 받아 자리로 몇 미터 걸어오는 동안 바람에 떨어진 매화 잎 하나가 국위에 내려앉았다.

밥에서 나는 것인지, 국위에 떨어진 꽃잎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사방 매화 속에 둘러싸인 공기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매화향이 향긋했다.

●'골 때리지 않는 뻘떡주' 마시러 화개장터 가볼까

오후 3시 40분에 다시 버스에 올라 이번에는 화개장터로 출발. 화개 장터 앞 편도 1차로 좁은 길에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엉겨 혼잡했다.

주차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화개장터를 둘러볼 시간은 약 20여분 밖에 남지 않았다. 오후 5시 반 구례구역을 출발하는 열차에 오르기 위해서는 늦어도 오후 4시 40분에는 화개장터를 출발해야 했다.

경남 하동군, 강 건너 전남 구례군과 맞닿아 있는 화개장터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곳.

관광 가이드들은 "요즘은 지역특산물 외에도 수입 농산물도 많이 유통된다"고 한다. 하지만 값 좀 깎아주면 큰 일 날것처럼 엄살 부리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물건값을 흥정하는 맛에 사람들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한다.

●매화향 가득 품고 서울로

4시 40분 화개장터를 출발한 버스는 5시 10분경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타고 왔던 열차는 정확히 5시 20분에 도착. 관광객들을 태우고 5시 30분 역을 출발했다.

역으로 오는 버스 내에서 가이드 임 대표는 또 귀에 솔깃한 말을 한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나들이를 다니면서 몸을 즐겁게 하고 살생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 그 모든 게 내게 복으로 돌아와 한 해 동안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버스 승객 중에 이 말에 동의 안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든 분위기. 그들 또한 복을 줘야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임대표의 말은 한참 동안이나 버스 안에 여운을 남겼다.

●그 여자 목소리…

내려오는 열차에서 "6번 열차에서 공연이 있을 예정…"이라고 안내 방송을 했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DJ로 변신했다.

가이드들이 나눠준 엽서에 적어 보낸 사연을 읽어주며 신청곡을 틀어주는 그 목소리로 인해 기차 여행의 질이 확 높아지는 느낌. 누굴까….

가이드에게 "방송을 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 오전에 공연이 열린 6번 칸으로 다시 갔다.

거창한 방송시설은 없었다. 접이식 의자 한쪽에 앉아 마이크를 쥐고 엽서를 읽고 있었고, 나머지 가이드들은 열차 바닥 아무데나 앉아 승객들이 보내온 엽서 중에서 재미있는 사연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 아나운서는 알고 보니 정규 방송을 진행하는 프로아나운서 황남희씨(29).

황 아나운서는 연세대 신방과를 졸업하고 케이블 뉴스 앵커 출신인 프리랜서 전문 아나운서. 그는 열차 도착 안내방송까지 맡고 있다.

이 열차는 매화가 지기 전인 22일까지 한시적으로 운행한다. 1인당 5만7000원. 상당 수 여행사들이 관련 패키지 상품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대드림투어의 경우 인터넷(www.hyundaidreamtour.com)과 전화(1544-7755)로 문의하면 된다.

글·사진=나성엽 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