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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71년 파리코뮌 진압 시작

입력 | 2008-05-21 03:05:00


1871년 5월 21일 일요일. 파리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이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튈르리 궁전 정원에 모여 콘서트를 감상하고 있었다.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였다.

이 틈을 타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미리 심어놓은 스파이로부터 생클루 문 인근에 수비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베르사유군은 일차 선발부대를 보내 일대를 장악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평의회에 도착하자 평의원들은 서둘러 산회한 뒤 방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전쟁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파리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망자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5만 명까지…. 10만여 명이 체포돼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됐다. 일부는 식민지인 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됐다.

레닌이 훗날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한 파리코뮌은 태어난 지 72일 만에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사라졌다.

파리코뮌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굴욕적으로 항복하자 파리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탄생했다. 민중의 투쟁이 만들어낸 반란 정부로서 파리코뮌은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지향점을 가진 혁명가들로 들끓었다. 혁명독재 정부를 수립하려는 블랑키파, 자코뱅파 같은 다수파와 자율적 코뮌연합을 지향하는 인터내셔널 소속 소수파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들은 혁명가, 정치가로선 뛰어났는지 모르지만 훌륭한 군인은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일부는 ‘기품 있는 죽음’을 선택했다. 실크햇에 연미복 차림으로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가 베르사유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홀연히 연기 속으로 사라진 들레클뤼즈처럼….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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