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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英엘리자베스 공주 軍입대

입력 | 2008-03-04 02:59:00


최근 영국에선 영웅이 한 명 탄생했다.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손이다. 온갖 말썽을 부려 왕실의 골칫덩이였던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최전선에서 복무했다는 사실 하나로 단박에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영국의 일부 언론이 “지나친 영웅화”라고 우려할 정도로 해리 열풍은 뜨겁다.

그를 보며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다. 여왕은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여왕이 해리 왕손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 언론에 알려졌다.

해리 왕손의 아프가니스탄행을 모두가 만류할 때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사람도 여왕이었다. 손자를 보면서 63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건 아닐까.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9세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기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졸랐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 3월 4일 WATS(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입대했다.

여자들로 구성된 WATS는 1938년 창설 당시에는 주 업무가 취사, 사환 업무, 부대 내 매점 관리 등이었지만 전쟁이 확산되자 운전, 탄약 관리 등으로 확대됐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왕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흙바닥에 앉아 차량을 고쳤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는 모습, 트럭의 보닛을 열고 수리하는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당시의 활동상을 말해 준다.

해리 왕손의 참전을 계기로 영국 왕실의 군 복무 전통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찰스 왕세자는 5년간 해군과 공군에서 복무했고 해리 왕손의 삼촌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틀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왕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군 복무 중 사망한 사람도 있다.

영국 왕실이 영국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군’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