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납치한 탈레반 무장세력이 23일 오후 11시 45분경 협상 시한을 또다시 연장했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이날 하루도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발언이 잇따르면서 숨 가쁜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이날 오후 무장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의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발언을 흘려 한때 인질 석방 협상이 결렬되는 것은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또 탈레반 측이 석방 요구 대상자 수를 늘리는 등 ‘요구 조건’을 높였다는 얘기가 나오고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대원 석방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혀 협상 결렬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고조됐다. 현지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정부는 아프간 현지 정부와 전날 현장에 급파한 정부대표단의 채널을 동시에 가동하면서 피랍자들의 안전하고 신속한 송환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피랍자 석방 협상 시한 또 연장
○…이날 아프간 현지에선 한때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돼 피랍 한국인들의 운명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됐다.
탈레반 측이 먼저 공세에 나섰다. 현지 통신사인 아프간이슬라믹프레스(AIP)에 따르면 탈레반 지휘관인 압둘라 잔의 대변인은 “(아프간) 정부와의 협상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직접 우리와 대면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공은 한국과 아프간 정부의 코트로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하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외신과의 통화에서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요구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 아프간 정부는 협상에서 솔직하지 않았다”며 “지금까지 진행된 협상에서는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몇 시간 뒤에는 아프간 정부 쪽에서 “한국인 23명과 탈레반 수감자 23명을 교환하자는 탈레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경 발언이 터져 나와 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사이의 협상이 난항을 겪는 와중에 탈레반 측이 요구 조건을 높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AP통신은 가즈니 주 출신 국회의원인 카일 무하마드 후세이니 씨의 말을 인용해 “탈레반이 한국인 인질을 풀어주는 대가로 가즈니 주에 있는 반군 수감자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아마디 대변인은 “그런 요구는 없었으며 23명 석방 요구가 전부”라고 반박해 후세이니 씨의 전언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이에 앞서 AIP통신은 탈레반 관계자의 말을 들어 “석방 요구 대상 명단이 완성됐으며 곧 정부 측에 건네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부 만소르라는 가명의 탈레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탈레반이 만든 명단에 탈레반의 가즈니 주 최고위급 사령관 가운데 1명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한국인 인질 석방 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는 현지 관계자들의 발언과 보도가 잇따라 낙관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제마라이 바샤리 내무부 대변인은 “이 문제에 대해 온종일 쉬지 않고 매달리고 있다”며 “한국인의 석방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조금 더 높아졌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지역 원로들이 납치 세력을 만나고 있으며 협상이 진전을 이뤘다”고 한 카라바그 경찰 책임자 크와자 모하메드 시디키 씨의 발언을 전했다. 또 다른 현지 경찰 관계자인 알리 사흐 씨도 “매우 희망적이며 협상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는 아프간 무장단체의 실체를 파악했으며 무장단체와 접촉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무장단체는 외신을 통해 ‘한국군 철수→탈레반 포로 석방→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 등 다양한 요구조건을 내걸면서도 정작 한국 정부 대표단에는 정확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당국자는 23일 브리핑에서 “직접 협상하자는 제의는 확인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아프간 정부는 이번 사태를 조기 해결하기 위해 수도 카불에 파견된 문하영 전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대책회의에 참가시켜 교섭 과정에 관여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특사 성격의 고위급 인사를 파견해 상대국 정부의 영향력 행사를 촉구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상대국 정부의 대책회의에 직접 참석해 정부 견해를 설명하고 사태 해결에 보조를 맞추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탈레반 측이 통보한 3차 협상시한인 23일 오후 11시 반이 다가오자 정부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청와대는 이날 오후 10시경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어 아프간에 파견된 조중표 외교통상부 제1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대표단이 보내온 보고서를 토대로 대응 방안을 숙의했다.
외교부도 “무장단체 측과 직간접 접촉이 계속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현재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초기의 긴장상태를 놓치지 않고 있다”며 “알려진 협상 시한이 실제 맞는 것인지, 또 그것을 제시한 사람과 납치 무장 세력과의 관계 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피랍자의 조기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장기화 가능성 등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