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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입력 | 2007-02-20 03:00:00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낙오자의 만남… 이별… 그리고 용기

가수 신해철은 서태지의 음악에 대해 주류의 대열에서 뛰쳐나온 ‘낙오자’ 정서를 담고 있고, 자신의 음악은 주류를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 머물러 있는 ‘비겁자’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에릭 호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문득 서태지식 ‘낙오자’라는 규정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미국의 떠돌이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의 ‘트루스 이매진드(Truth Imagined)’를 완역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1941년 부두 노동자로 ‘정착’하기까지의 반생을 몇 가지 에피소드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기에 ‘자서전’으로 이름 붙이더라도 손색이 없다.

에릭 호퍼는 가난과 실명(글자를 익힌 뒤인 8세 때 실명하였으나 15세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등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행상과 떠돌이, 웨이터, 부두 노동자 등을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사상가다.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 뒤 1951년 첫 저서 ‘맹신자들’을 비롯해 10여 권의 사회철학 저술을 남겼으며 81세로 사망하기 전해인 1982년 생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점은 하층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처지에 대해 자기과장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낙관주의적 허세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그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의 내용은 대부분 저자가 떠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교수직 대신 고물상이 된 유대인 샤피로를 비롯해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대학생 헬렌, 유능한 일꾼 앤슬리, 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유산을 사회에 환원한 농장주 쿤제 등 수많은 인물과의 만남과 이별이 저자의 경험을 살찌우고 있다. 저자로 하여금 단순한 떠돌이 노동자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독특한 사회철학자로 성장시킨 것은 독서열(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저자는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과 아울러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었다.

물론 타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대부분 저자의 투철한 관찰력과 결합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으로 승화된다.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가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방랑자로 살기로 결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센트로 임시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이다.

공장과 감옥의 결합체와도 같은 그곳에 모인 수용자 200여 명이 대부분 ‘적응 불능자’임을 발견한 뒤, 저자는 이 적응 불능자야말로 새로운 개척자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게 보통이지만 약자에게 내재하는 자기혐오가 훨씬 더 강한 에너지를 부여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결별하고 자연을 넘어서게 하는 일탈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류에서 낙오해 ‘다르게’ 사는 삶이 서태지와 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용기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신승엽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