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유대인 소년 루이 메이어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고철 줍는 일을 했다. 10대 후반에 미국 보스턴에서 처음 들어가 본 영화관은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한 세기가 흐른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사람으로 ‘MGM(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영화사 최고경영자를 지낸 메이어를 선정했다. 1907년 11월 28일, 이날 25세 청년이었던 메이어는 고물상으로 번 돈을 투자해 미 매사추세츠 하버빌에 처음으로 극장을 열었다.
몇 년 새 뉴잉글랜드 지역 최대의 극장 체인을 이뤄 낸 그는 이윽고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 ‘국가의 탄생’(1915년)의 배급권을 쥐었다. 뉴잉글랜드에서 팔려 나간 영화 티켓 수익금의 90%가 그에게 돌아갔다. 5만 달러를 투자해 10배인 5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다.
그는 영화를 직접 제작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당시 인기 있는 여배우 아니타 스튜어트를 기용해 눈물깨나 짜내는 영화 시리즈를 찍었다. 메이어에게는 시작에 불과했다.
1925년 메이어가 설립한 ‘루이스 B 메이어 픽처스’가 메트로 픽처스와 합병한 골드윈 프로덕션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면서 MGM이 탄생했다. 메이어는 25년간 이 영화사의 CEO로 활약했다.
메이어의 ‘히트 공식’은 스타 기용, 그리고 순수한 로맨스였다. 클라크 게이블, 그레타 가르보, 캐서린 헵번, 주디 갈런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톱스타가 등장하는 영화는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MGM은 할리우드 최대 영화사로 자리 잡았다. 당시 밤하늘보다 MGM에 ‘스타’가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대지’(1937년), ‘벤허’(1925년·1959년), ‘오즈의 마법사’(1939년), ‘사랑은 비를 타고’(1952년) 등이 연속 히트를 기록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도 MGM만은 이익을 배당했다. 메이어는 미국 최초로 연봉 100만 달러를 받는 CEO가 됐다.
하지만 어디에나 끝은 있는 법. 메이어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족영화와 뻔한 로맨스 물은 전후 시대에 더는 관객을 붙들어 매지 못했다. 정부는 거대 극장 체인을 매각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톱스타와 감독들은 수익 배분을 요구하고 나섰다.
MGM은 1950년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960년대부터는 경영진이 계속 바뀌었다. 2004년에는 소니가 인수대금 29억4000만 달러와 함께 부채 19억 달러를 떠안는 조건으로 MGM을 사들였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